[서효인의 소설처럼] 0%에서 시작하기 -서이제 소설 ‘0%를 향하여’
2021년 12월 02일(목) 01:00 가가
오늘날 광주극장은 누군가에게는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누군가에는 미학적 감흥을 제공하는 독립영화·예술영화 전문 상영관이 되었다. 하지만 20년 전에는 그저 단관 영화관 중 하나에 불과했다. 1998년 국내 최초 복합상영관 CGV 강변이 생기면서 영화관의 모습은 빠르게 바뀌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흐름 안에 광주 또한 별수 없이 속하게 되어 있었으니, 태평극장이니 무등극장이니 제일극장 같은 오래된 극장은 쓸려나갔다. 그리고 광주극장만이 그 자리에 그 이름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영화관이 되었다.
대학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오우삼 감독의 ‘미션 임파서블 2’를 광주극장에서 보았는데, 분명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상영하던 극장이 군대에 다녀오자 성격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광주극장에서 본 영화는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할머니·할아버지 합창단이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 ‘로큰롤 인생’이었다. 그리고 광주극장은 이제 독립영화 상영관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나름대로 리모델링과 현대화를 통해 살길을 도모하던 다른 극장들과 달리, 자의든 타의든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흥행이 될 리 만무한 독립영화를 상영함으로써 다른 향토 극장과는 다르게 생존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를 느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팬데믹 시대에 복합상영관이 급격하게 쇠퇴하고 집안 거실에서 혹은 손안의 휴대전화로 즐길 수 있는 OTT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는 감히 쉽게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를 둘러싼 매체의 역사는 짧은 기간 이룬 영화의 두텁고 가파른 성과만큼의 곡절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곡절 안에 ‘시네필’이라 불리는 젊은 영화인과 영화학도와 영화 관계자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몇몇 소수의 성공에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될 동안 묵묵히 혹은 뜨겁게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왔다. 그들은 1%가 아닌 ‘0%를 향하여’ 있는 것이다. 어쩌면 상업영화의 포트폴리오가 되거나 이미 망해 버렸지만 그래도 놓을 수 없는 독립영화를 찍으면서 종래에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서이제의 소설 ‘0%를 향하여’는 그들의 모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담은 필름이다. 주인공 ‘나’는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여, 영화를 그만두려고 한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과 아카데미를 석권하고, 100주년을 축하하는 각종 행사와 특별전이 열리며, 천만 관객 영화가 다섯 편이 나왔지만, 이제 영화를 관두려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나보다 먼저 영화를 그만두고 강릉에 정착한 친구 ‘석우’가 있다.
독립영화판은 답이 없다고 말한다. 언제는 답이 있었나 싶지만, 지금 답이 없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열악한 처우는 개선될 기미가 없고, 상업영화로의 진출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영화판으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은 많아, 그들에게 과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일용직도 마다하지 않고 영화를 찍기 위해 돈을 벌지만, 영화를 찍고 나면 다시 무일푼이다. 독립영화이지만 유명 배우가 출연해야 성공의 여지가 생기고, 이젠 그게 독립영화가 맞는지조차 의심이 든다. 이제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의 포트폴리오 역할도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정말 그만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와 석우의 난처함은 영화를 하는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다. 선거철만 되면 정해진 레퍼토리처럼 여기저기서 ‘청년’을 호명하는데, 그들에게 아니 우리에게 청년은 어떤 의미일까. 혹여 가난하고 불안정하고 미성숙한 세대로 대상화하여 추상적인 존재로 그들을 가둔 건 아닐까.
서이제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젊고, 부자가 아니며, 안정과 성숙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에서 굳건하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알며 그것을 해내려 노력하고,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구조를 논리적으로나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며 현재를 산다. 현재를 살아 냄으로써 미래를 만든다.
서이제의 소설에는 서사의 윤곽이 흐릿하나, 교차하는 빛과 어둠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진실을 섣불리 예측하거나 단언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머무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살아남은 예술영화관처럼, 시대적이지 않으나 기어코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써 낸다. 지금의 청춘이 그러하듯이, 1%가 아닌, 0%를 향하는, 아이러니를 발산하며. <시인>
서이제의 소설 ‘0%를 향하여’는 그들의 모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담은 필름이다. 주인공 ‘나’는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여, 영화를 그만두려고 한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과 아카데미를 석권하고, 100주년을 축하하는 각종 행사와 특별전이 열리며, 천만 관객 영화가 다섯 편이 나왔지만, 이제 영화를 관두려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나보다 먼저 영화를 그만두고 강릉에 정착한 친구 ‘석우’가 있다.
독립영화판은 답이 없다고 말한다. 언제는 답이 있었나 싶지만, 지금 답이 없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열악한 처우는 개선될 기미가 없고, 상업영화로의 진출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영화판으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은 많아, 그들에게 과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일용직도 마다하지 않고 영화를 찍기 위해 돈을 벌지만, 영화를 찍고 나면 다시 무일푼이다. 독립영화이지만 유명 배우가 출연해야 성공의 여지가 생기고, 이젠 그게 독립영화가 맞는지조차 의심이 든다. 이제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의 포트폴리오 역할도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정말 그만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와 석우의 난처함은 영화를 하는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다. 선거철만 되면 정해진 레퍼토리처럼 여기저기서 ‘청년’을 호명하는데, 그들에게 아니 우리에게 청년은 어떤 의미일까. 혹여 가난하고 불안정하고 미성숙한 세대로 대상화하여 추상적인 존재로 그들을 가둔 건 아닐까.
서이제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젊고, 부자가 아니며, 안정과 성숙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에서 굳건하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알며 그것을 해내려 노력하고,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구조를 논리적으로나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며 현재를 산다. 현재를 살아 냄으로써 미래를 만든다.
서이제의 소설에는 서사의 윤곽이 흐릿하나, 교차하는 빛과 어둠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진실을 섣불리 예측하거나 단언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머무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살아남은 예술영화관처럼, 시대적이지 않으나 기어코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써 낸다. 지금의 청춘이 그러하듯이, 1%가 아닌, 0%를 향하는, 아이러니를 발산하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