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읽기의 즐거움
2021년 09월 23일(목) 02:00 가가
오랜만에 긴 여운을 남기는 소설을 만났다. 일본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가 쓴 ‘여름은 오래 그 곳에 남아’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건축학과를 막 졸업한 주인공 ‘나’가 존경하는 무라이 선생의 건축사무소에 취직하면서 펼쳐지는 어느 여름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매년 여름이면 무라이 선생이 설계한 별장으로 일터를 옮기는 무라이 건축사무소는 ‘나’가 입사하던 해에도 별장 사무소에서 현상 공모 준비를 한다. 소설은 특별한 사건의 전개나 갈등 없이 등장인물들과 자연풍경에 대해, 건축과 인생에 대해 느릿느릿 들려주며 한 편의 장편시처럼 흘러간다.
책을 읽다 보면 밑줄을 긋게 만드는 문장들을 여럿 만나게 된다. 가령 건축의 ‘전체’와 ‘세부’에 대한 이야기 중 나오는 이런 문장을 들 수 있겠다. “태아는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손가락은 태아가 세계에 접촉하는 첨단이지. 손가락으로 세계를 알고 손가락으로 세계를 만들어. 의자는(건축에서) 손가락과 같은 것이야. 의자를 디자인하다 보면 공간 전체가 보이기도 하지.”
‘의자’에 대한 대화가 특별히 나의 기억에 남은 건, 아마도 광주디자인비엔날레(10월31일까지)에서 만났던 의자 컬렉션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혁명을 위한 빛나는 생각들’ 섹션은 친숙한 ‘의자’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알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었다.
마스크를 재활용해 만든 의자는 한 달 동안 버려지는 마스크가 1290억 장에 달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앉는다’는 의자의 역할 자체를 뒤집어 생각해 보게 하는 ‘쓸모없는 잠재력’에는 오랫동안 관람객들이 머물다 갔다. 실물 책을 활용해 만든 ‘책 읽는 의자’, 낡은 의자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푸르스트 체어’, 의자가 하고 싶은 말을 상상해 본 ‘의자가 입을 떼는 순간’도 눈길을 끌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만난 책은, 조용조용 이야기를 건네며 디자인비엔날레 전시장으로 나를 이끌고, 다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1번’과 비틀즈의 ‘블랙버드’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근사한 책이 가져다준 행복을 모두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김미은 문화부장 mekim@kwangju.co.kr
책을 읽다 보면 밑줄을 긋게 만드는 문장들을 여럿 만나게 된다. 가령 건축의 ‘전체’와 ‘세부’에 대한 이야기 중 나오는 이런 문장을 들 수 있겠다. “태아는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손가락은 태아가 세계에 접촉하는 첨단이지. 손가락으로 세계를 알고 손가락으로 세계를 만들어. 의자는(건축에서) 손가락과 같은 것이야. 의자를 디자인하다 보면 공간 전체가 보이기도 하지.”
여름의 끝자락에서 만난 책은, 조용조용 이야기를 건네며 디자인비엔날레 전시장으로 나를 이끌고, 다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1번’과 비틀즈의 ‘블랙버드’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근사한 책이 가져다준 행복을 모두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김미은 문화부장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