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첫걸음은 용서와 화해에서-김원명 광주원음방송 교무
2021년 07월 30일(금) 07:30 가가
코로나19 확산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2020 도쿄올림픽이 진행되고 있다. 스포츠 정신에 입각해 승과 패가 아닌,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찌는 듯한 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만든다. 그러나 개막식이나 경기 해설 중 다른 나라를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말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세계인의 축제와 함께한다는 의식, 그리고 하나라는 생각이 부족하여 나타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목할 점은 이번 올림픽에 북한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북이 함께한 2018 평창 올림픽에서의 감격스러운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한데 요즘은 대선 후보들조차 통일과 대북 관계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천주교의 ‘정의구현사제단’과 불교의 ‘실천불교승가회’, 그리고 개신교 ‘목회자정의평화위원회’와 원불교 ‘사회개벽교무단’은 오래 전부터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연대해 왔다. 종교인들의 통일운동은 계급적 관점이나 이념적 관점보다는 민족의 양심과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근본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남과 북은 이념과 체제의 장벽뿐 아니라 6·25병란으로 인한 원한이 겹겹이 쌓여 있다.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화해의 길을 열 수 없는 상황이다.
겹겹이 쌓인 원한의 찌꺼기를 털어 내려면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 부처님의 대자대비의 마음, 해원상생(解寃相生)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는 일은 상대적 사랑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이 화해로 가는 길은 반드시 서로를 용서하는 깊은 사랑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남침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거나 답방에 대해 협의하는 것을 구걸이라고 폄하하는 행동은 결국 화해를 더디게 하고 통일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물론 과거에 대한 시비를 판가름해야 할 일도 있겠지만 그것이 화해와 통일을 위해 어떤 득이 될 것인가?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종교적 가르침에서 본다면 모든 것이 자기의 허물이요, 죄임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민족의 아픔을 각자의 잘못으로 돌려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성숙된 자세를 가질 때 천지도 감응할 것이며 모든 원한이 녹아지는 해원상생의 세계도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상대방을 수용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화해의 신학’과 ‘상생의 교학’을 수립하고 발전시켜 선교와 포교 그리고 교화의 바탕을 삼는다면 종교인들의 통일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한결 커지리라 본다.
그동안 정부 당국에서나 민간 사회단체에서 북한 돕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북한이 경제력을 회복하는 데는 아직 미흡하다고 보여진다. 남한 경제 역시 어두운 면이 있지만 북한의 상황과는 그 내용이 다르다. 상호주의를 내세우며 퍼주기니 일방적이니 하며 북한 지원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적지 않지만 이익이 되는 것은 명확한 일이다. 외교에 있어서 상호주의는 기본이라 할 것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 북한의 환경과 경제가 잘못될수록 통일의 길은 멀어질 것이며 설사 그런 사정으로 통일이 된다 해도 우리나라의 짐이 되고 아픔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통일은 바로 민족 경제를 튼튼히 하고 급변하는 세계 경제체제에서 우리의 위치를 바로 세우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상호주의 논리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와 양보주의가 더 큰 국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데도 눈을 떠야 한다.
종교는 그간 민간 차원의 대북 지원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특히 북한에 있는 교회나 사찰과 연결한 지원 사업은 선교·포교·교화적 목적도 있기에 신자들의 참여와 호응을 얻는 데 유리한 점이 많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인들의 대북 지원과 협력 운동이 단순한 선교 목적을 넘어서서, 순수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진행될 때 공덕이 더욱 커진다는 점에도 마음을 썼으면 한다. 부처님께서는 무념(無念)으로 하는 보시가 가장 큰 공덕이라 하셨다.
천주교의 ‘정의구현사제단’과 불교의 ‘실천불교승가회’, 그리고 개신교 ‘목회자정의평화위원회’와 원불교 ‘사회개벽교무단’은 오래 전부터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연대해 왔다. 종교인들의 통일운동은 계급적 관점이나 이념적 관점보다는 민족의 양심과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근본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남과 북은 이념과 체제의 장벽뿐 아니라 6·25병란으로 인한 원한이 겹겹이 쌓여 있다.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화해의 길을 열 수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정부 당국에서나 민간 사회단체에서 북한 돕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북한이 경제력을 회복하는 데는 아직 미흡하다고 보여진다. 남한 경제 역시 어두운 면이 있지만 북한의 상황과는 그 내용이 다르다. 상호주의를 내세우며 퍼주기니 일방적이니 하며 북한 지원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적지 않지만 이익이 되는 것은 명확한 일이다. 외교에 있어서 상호주의는 기본이라 할 것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 북한의 환경과 경제가 잘못될수록 통일의 길은 멀어질 것이며 설사 그런 사정으로 통일이 된다 해도 우리나라의 짐이 되고 아픔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통일은 바로 민족 경제를 튼튼히 하고 급변하는 세계 경제체제에서 우리의 위치를 바로 세우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상호주의 논리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와 양보주의가 더 큰 국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데도 눈을 떠야 한다.
종교는 그간 민간 차원의 대북 지원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특히 북한에 있는 교회나 사찰과 연결한 지원 사업은 선교·포교·교화적 목적도 있기에 신자들의 참여와 호응을 얻는 데 유리한 점이 많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인들의 대북 지원과 협력 운동이 단순한 선교 목적을 넘어서서, 순수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진행될 때 공덕이 더욱 커진다는 점에도 마음을 썼으면 한다. 부처님께서는 무념(無念)으로 하는 보시가 가장 큰 공덕이라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