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보기와 따라가기-최현열 광주 온교회 담임목사
2021년 07월 16일(금) 03:00
어릴 적 많이 가지고 놀던 것들이 생각났다. 그중에서 참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중에 자석이 있었다. 자석이라는 놈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었다. 몇 시간을 가지고 놀아도 질리지 않았다. 모래 속의 철가루를 모아서 책받침 위에 놓고 밑에 자석을 떼었다 붙였다 하면 마치 철가루가 살아 있는 듯이 쭈뼛 서지를 않나, 자석을 움직이면 따라오면서 온갖 모양을 만들어 내지를 않나. 또한 S극과 N극이 끄트머리에 영어로 표시가 되어져 있는 막대자석은 파랑색과 빨강색으로 구분이 되어져 있었다. 같은 극을 마주하면 밀어내고 절대로 붙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극을 마주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달라붙어서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자석의 극과 극은 따로 떨어져 있는 몸이 아니다. 붙어 있는 한 몸이라는 것은 참 재미있는 영감을 준다. 우리 형제는 오남 삼녀로 꾀나 형제가 많은 편에 속한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나 누나는 감히 근접할 수 없었고 두세 살 터울인 누나나 동생은 사소한 다툼이나 언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큰 것이 작은 것하고 똑같다’고 말씀하시며 혼내시곤 하셨다. 누구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는 자기의 고집 때문에 두 눈을 부릅뜨고 마주보고 씩씩거리는 것 아니겠는가? 내 생각이 맞고 자기주장이 무조건 옳다는 것이다. 이런 마주 보기의 결론은 부모님의 회초리나 벌서기 등으로 이어지고 결국 억지로라도 화해를 해야만 그 끝이 났다.

‘양자택일’ ‘흑백논리’ ‘모 아니면 도’ ‘우리 편이냐 상대편이냐’ 이런 말들은 너무 극단적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우리나라 국민성은 주체성이 강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표현이 많고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감이 많이 가는 말이다. 어떤 단체든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존중과 배려보다는 자기주장과 날카로운 비판으로 상대를 이기지 못하면 마치 패배자가 된 것인 냥 그 분함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구약 성경에는 다니엘이라는 선지자가 있다. 재미있는 일화 중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등장하는데 이 왕이 참 엉뚱한 면이 있다. 꿈을 꾸어 놓고 꿈 내용을 말하지 않으면서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알아맞히고 해몽도 해내라고 신하들을 다그친다. 왕 앞에 나온 점쟁이들과 마법사들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말씀해 주어야 해몽을 할 것 아닙니까, 하며 지극히 당연한 요구를 한다. 하지만 왕은 그들이 능력도 없으면서 시간만 끌려고 한다며 분한 나머지 모든 지혜 있는 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다니엘은 이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바벨론의 다른 지혜 있는 자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결국 다니엘은 왕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맞히고 그 꿈도 해몽해 주었다. 다니엘의 해몽으로 그 친구들과 다른 지혜자들의 목숨도 건질 수 있었다. 다니엘은 자기의 정적이며 왕 앞에서 지혜를 다투어야 할 자들이고 무엇보다 종교적으로 물리쳐야 할 집단들이었지만 그 모두를 살려내는 능력을 발휘한다. 누구를 짓밟고 올라서거나 상대를 꺾어야만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마주 보기를 잘못하여 밀어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따라가기를 통한 상생과 협력이 필요하다. 자석에는 양극이 있지만 결국은 한 몸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이에게 존경을 표하듯,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해 주는 이에게도 그 못지않은 존중이 필요하다. 남을 나보다 못하게 여기고 신분의 선을 긋고 차별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성경에 “예수님은 둘로 하나를 만들고 막힌 담을 허신다”고 하였고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였다. 코로나로 인해 서로 지쳐가는 이때 공교롭게도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대립 또한 극명해져 모든 이들을 가슴 아프게 한다. 이 무더운 날에 얼음냉수같이 듣는 이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소식을 듣고 싶다.

실시간 핫뉴스

많이 본 뉴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