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밥먹고합시다] 코로나 시대의 밥 먹기
2021년 07월 01일(목) 09:00 가가
코로나로 우리는 전대미문의 고통을 겪고 있다. ‘비대면’의 일상화는 장점도 있지만, 접촉함으로써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인간의 오랜 관습을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는 삶의 양태를 많이 바꾸었다. 음식과 식당 쪽에서는 충격적이라고 할 만큼 타격이 컸다. 집합 제한은 매출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회식이 없어지고, 각종 모임이 사라졌다. 단체손님을 받아 유지하던 식당은 전업하거나 폐업을 많이 했다.
식당 사이에 투명 칸막이를 설치한 것은 상징적이다. 누구도 바이러스는 잡을 수 없다는 것, 거리 두기를 해야만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어떤 선언의 표식처럼 보인다. 배달이 폭증한 건 이 시대가 보여 주고 있는 명징한 그림이다. 모이지 않고, 시켜서 각자 먹는다. 음식 배달 분량의 절대 다수가 1~3인분이다. 짜장면 한 그릇 시킬 때 눈치 보이던 것도 없어졌다.
배달비가 생긴 것도 배달 시대 1백년의 기념비적인(?) 변화랄까. 이미 일제강점기에 대도시에는 배달이 유행했다. 설렁탕과 국수, 냉면이 주 종목이었다. 배달비는 거의 없었다. 사람 비용이 엄청나게 싸던 시절이었으니까. 서울을 예를 들면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으로 월급을 대신하던 때도 있지 않았던가. 70년대 중반에 중동전쟁이 터지면서 당국의 주1회 강제 휴무령이 내려지기 전에는 휴일도 없이 일하던 시대였다.
배달이 스마트폰으로 들어가면서 생겨난 일도 많다. 리뷰의 일상화다. 작은 동네가 배달권이던 때는 입소문으로 식당의 특성과 맛을 다들 알고 있었다. 이제는 배달 주문한 식당 주인이 누구인지, 심지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아무도 모른다. 그저 배달시킬 뿐이다. 입소문 대신 리뷰가 그 일을 담당한다. 리뷰 조작과 이른바 ‘진상 손님’의 별점 테러 같은 일이 기사가 된다.
입소문으로 알던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비대면 상황에서 사람들은 훨씬 더 공격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많다. 모르는 이에게는 친절하지 않은 관습이다. 그런 특성이 리뷰나 배달원을 대하는 태도로 드러나서 문제가 되곤 한다. 아는 이가 아니니, 냉정해지는 셈이다. 늦게까지 밥 먹고 술 마시던 습관(?)도 많이 달라졌다. 대중교통도 일찍 끊어지니, 집으로 집으로 향했다.
유튜브 등을 보고 집에서 요리하는 취미도 늘어만 간다. 학교 못 가는 아이들을 건사하고 놀아 주고 가르치는 일이 일상의 큰 부담이 되었다. 유튜브 중에 조리법을 가르치는 채널이 폭증했다. 특히 집밥을 알려주는 ‘할머니 부대’의 등장은 흥미롭다. 밥 안치는 법부터 콩나물무침, 된장국, 제육볶음, 나물 요리 같은 전통적인 집밥 채널이 대박을 쳤다. 세상의 흐름이라기보다 코로나가 전해준 현상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사라져 버릴 것 같던 세대의 손맛이 유튜브로 전해진다니. 이것은 정말 대환영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 손맛은 그렇게 한국에서 이어져 갈 듯하다.
역시 코로나는 위생 면에서 큰 비용 부담을 안겨 주었다. 대신 혁명적이라고 할 인식 개선도 선사했다. 손 씻기가 일상화되고, 식당의 위생을 따지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던 반찬 공유가 이젠 거의 사라져 간다. 행정 당국에서 그토록 덜어 먹기나 국자 제공 등을 호소했어도 잘 먹히지 않던 것이 코로나 사태 한 방으로 갑자기 개선되고 있는 셈이다. 코로나의 힘이 무섭다고나 할까. 반찬 재활용 역시 여전히 남아 있지만, 손님들이 당당히 요구하면서 근절 가능성이 커졌다.
코로나는 백신 보급 등으로 위세가 꺾일 거라고 보는 예상이 대세다. 하나 완전히 없어질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독감이 매년 다른 얼굴로 바꾸고 우리를 위협하던 것처럼 말이다. 경천동지할 변화를 코로나가 야기시켰고, 우리는 그것을 감내하고 있다. 최근 집합 인원 제한이 완화되거나 삭제되고, 영업시간 등도 늘어나고 있다. 금지 업소들도 문을 다시 열었다.
반가운 소식이지만, 외국에서 들려오는 변이 바이러스 소식이 불안하다. 우리는 잘 이겨 냈다. 인내심 있게 1년 반 이상을 버텼다. 그 기간 동안 한계에 다다랐다고 힘들어 하기도 했지만 또 끌고 갔다. 코로나가 다시 강해진다고 해도 우리는 그렇게 이겨 낼 것이다. 사람들이 다시 포옹하고 손을 잡을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친구들끼리 밥을 나누고, 막걸리 한 잔을 편하게 마실 날이 오리라고. 더한 고통도 견뎌 냈던 민족이니까.
입소문으로 알던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비대면 상황에서 사람들은 훨씬 더 공격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많다. 모르는 이에게는 친절하지 않은 관습이다. 그런 특성이 리뷰나 배달원을 대하는 태도로 드러나서 문제가 되곤 한다. 아는 이가 아니니, 냉정해지는 셈이다. 늦게까지 밥 먹고 술 마시던 습관(?)도 많이 달라졌다. 대중교통도 일찍 끊어지니, 집으로 집으로 향했다.
유튜브 등을 보고 집에서 요리하는 취미도 늘어만 간다. 학교 못 가는 아이들을 건사하고 놀아 주고 가르치는 일이 일상의 큰 부담이 되었다. 유튜브 중에 조리법을 가르치는 채널이 폭증했다. 특히 집밥을 알려주는 ‘할머니 부대’의 등장은 흥미롭다. 밥 안치는 법부터 콩나물무침, 된장국, 제육볶음, 나물 요리 같은 전통적인 집밥 채널이 대박을 쳤다. 세상의 흐름이라기보다 코로나가 전해준 현상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사라져 버릴 것 같던 세대의 손맛이 유튜브로 전해진다니. 이것은 정말 대환영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 손맛은 그렇게 한국에서 이어져 갈 듯하다.
역시 코로나는 위생 면에서 큰 비용 부담을 안겨 주었다. 대신 혁명적이라고 할 인식 개선도 선사했다. 손 씻기가 일상화되고, 식당의 위생을 따지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던 반찬 공유가 이젠 거의 사라져 간다. 행정 당국에서 그토록 덜어 먹기나 국자 제공 등을 호소했어도 잘 먹히지 않던 것이 코로나 사태 한 방으로 갑자기 개선되고 있는 셈이다. 코로나의 힘이 무섭다고나 할까. 반찬 재활용 역시 여전히 남아 있지만, 손님들이 당당히 요구하면서 근절 가능성이 커졌다.
코로나는 백신 보급 등으로 위세가 꺾일 거라고 보는 예상이 대세다. 하나 완전히 없어질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독감이 매년 다른 얼굴로 바꾸고 우리를 위협하던 것처럼 말이다. 경천동지할 변화를 코로나가 야기시켰고, 우리는 그것을 감내하고 있다. 최근 집합 인원 제한이 완화되거나 삭제되고, 영업시간 등도 늘어나고 있다. 금지 업소들도 문을 다시 열었다.
반가운 소식이지만, 외국에서 들려오는 변이 바이러스 소식이 불안하다. 우리는 잘 이겨 냈다. 인내심 있게 1년 반 이상을 버텼다. 그 기간 동안 한계에 다다랐다고 힘들어 하기도 했지만 또 끌고 갔다. 코로나가 다시 강해진다고 해도 우리는 그렇게 이겨 낼 것이다. 사람들이 다시 포옹하고 손을 잡을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친구들끼리 밥을 나누고, 막걸리 한 잔을 편하게 마실 날이 오리라고. 더한 고통도 견뎌 냈던 민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