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1년 관방제림
2021년 06월 25일(금) 05:10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 아래로 몹시 게으르게 강이 흐른다. 강 위엔 오리배 몇 척 동동 떠다니고, 좁은 강변 주차장에서는 주차하려는 차들이 오리처럼 뒤뚱거리고 있다. 길게 이어진 제방 위로 오래된 나무들이 기분 좋은 그늘을 만들고, 나무 아래 평상엔 가족 친지들과 함께 나온 사람들이 휴일 오후의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적당히 더운 날씨 탓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사람들은 일요일다운 느긋함과 무방비 상태에 젖어 적당히 북적거린다.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진다. ‘이런 건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인데…’ 하는. 오래된 나무며, 나무 아래 낡은 가게들. 마치 시간을 30년 전쯤으로 돌려놓은 듯한 착각이 든다. 일행 중 한 명이 베트남 같다고 하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함께 베트남에 갔던 우리는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스타벅스에서 혼자 커피 마시는 게 요즘 감성이라면, 낡은 평상 위에서 역시 오래된 스테인리스 냉면 그릇으로 싸구려 국수를 먹는 이곳은 분명 레트로(복고풍) 감성이라 해야겠다.

일요일 오후의 관방제림은 덥고 시끌벅적했고, 달아오른 공기 속엔 찰나의 행복이 흠뻑 녹아 있었다. 다행히 친지들과 함께한 덕분에 나는 자연스레 행락객으로 동화될 수 있었다. 혼자 왔었다면 나 홀로 구경꾼이 되는 다소 불편한 경험을 했을 뻔 했다. 일요일 오후의 유원지에서 느끼는 유쾌하고 무장해제된 듯한 기분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다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어떻게 80년대의 느낌이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마음 한편에서 둥둥 떠다니는 일요일 오후.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함께하고 싶지만 함께하고 싶지 않은, 모순에 가득 찬 삶을 마주하고 있다. 외면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딱히 외면하고 싶지도 않은 익숙하고도 불편한 감정이 의식의 수면 위에서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은 종종 부러움과 측은함이 뒤섞힌 매우 복잡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마도 출가자라는 이방인의 신분으로 살아온 긴 세월 탓일게다. 요즘 들어 어떻게 알았는지 출가 전 인연들에게서 이따금 연락이 오곤 한다. 핸드폰 저 너머의 목소리는 나의 출가 전 호칭을 부르며 반가워한다. 마치 어제 만나고 헤어진 친구처럼 몹시 자연스럽다. 하지만 먼지 수북한 묵은 인연들이 아무래도 내게는 몹시 어색하다. 그런 나의 감정이 필시 전달되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너머의 말투는 경어와 평어가 적당히 섞여서 어정쩡하게 바뀐다. 출가자로 살아온 지난 시간 그 어디에도 가족이나 친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아니지… 어쩌면 동남아 어디쯤에서 펼쳐져야 할 풍경을, 그래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이 되어 즐겨야 마땅할 풍경을, 삶을 영위하는 일상에서 맞닥뜨린 데서 오는 당혹감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아무래도 정신 건강에는 좋을 듯하다. 하지만 어제의 풍경을 사진에 담지 않은 것은 나 역시 그 풍경의 일부로 있었음을 자인하는 명백한 증거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법정 스님 역)

‘나 홀로 산다’는 것은 사자처럼, 바람처럼, 연꽃처럼 사는 것이다. 사자처럼 불확실한 삶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에 마음 뺏기지 않고, 바람처럼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연꽃처럼 어떤 욕망에도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이 장수할 정도로 나 홀로 사는 것이 대세가 된 요즘이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나 홀로 살고 있지 못하다. 나 역시 그러하다. 아마도 나는 꽤 오래전부터 홀로 떠도는 나그네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산 듯하다. 하지만 많은 현대인들이 그러하듯 나는 다만 나그네처럼 나 홀로 사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지는 못했다.

글쎄… 나그네면 어떻고 나그네가 아니면 또 어떤가. 관방제림의 풍경이 80년대 9시 뉴스의 한 장면이면 어떻고, 베트남의 호이안 거리면 또 어떤가. 강은 흐르고, 또 일장춘몽 같은 우리들의 인생도 이렇게 흘러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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