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무등경기장의 폭격기는 어디로 갔는가
2021년 05월 06일(목) 04:00 가가
스포츠 경기장에 다시 관중이 들어간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한창 코로나가 2차니 3차니 하여 대유행을 하던 작년에는 거의 무관중 경기였다. 요즘 스포츠는 복합 비즈니스가 되었다. 과거처럼 입장 수입과 팸플릿 판매로 먹고살지 않는다. 선수를 사고팔며 미디어에 중계권을 넘겨 수익을 낸다. 선수의 옷과 기념품 판매도 한몫한다. 그래도 무관중은 큰 타격이다. 더구나 관중 없는 경기라는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스포츠는 누군가 같이 보고 있고, 그것은 경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프로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선구적인 역을 담당한 나라는 미국이다. 스포츠가 어떻게 산업이 되는지 실천적으로 보여 주었다. 박찬호부터 김병현이나 최희섭 같은 선수들까지, 그들이 활약하던 무렵 미국 메이저리그를 자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애국심(?)으로 우리 선수들의 활약에 몰두했지만 나중에는 경기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도 완벽하게 경기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현란한 카메라 편집, 뛰어난 선수의 기량, 훌륭한 시설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야구는 대체로 정적이어서 여유 있는 관람이 가능하다. 선수들이 ‘액션’을 하는 시간은 매우 적고, 대개는 사인을 교환하고 공을 기다리며 정강이를 곧추세우고 긴장하는 야수들의 눈빛이 경기를 채운다. 야구처럼 배 나온 선수들도 잘하는 스포츠는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야구는 뛰고 질주하는 시간이 아주 적다. 경기 내내 한 번도 전력 질주를 하지 않고도 욕 안 먹고 마칠 수 있는 스포츠가 야구다. 경기장의 선수가 그러하니, 관중들은 또 좀 느긋한가. 경기 후반에 역전 기미라도 있다면 모를까, 상당수 경기는 큰 긴장 없이 즐길 수 있다. 그것이 야구의 단점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야구의 진정한 묘미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경기 사이사이에 관중은 자기 나름대로 ‘자발적 정신의 참여’가 가능하다. 다음 대타는 누가 나올까. 무사 2루에서 나온 강타자를 상대 팀 감독은 거를 것인가. 이런 예측으로 경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여백의 순간들이 야구를 치밀하게 구성하지만, 나는 오히려 스스로 멋대로 즐긴다. 경기야 어찌 되든 맥주를 사 마시고, 치킨을 뜯거나, 그저 멍하니 푸른 잔디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곤 한다. 그래도 되는 인기 스포츠는 아마 없을 것 같다. 다른 구기 스포츠라면, 끊임없이 선수의 움직임과 공을 좇게 되지 않는가.
옛날 무등경기장은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텔레비전으로 워낙 많이 보았다. 왜냐하면 해태가 늘 우승하기도 했고 최고 인기 팀이니 중계 편성도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전 경기가 스포츠 채널로 중계되던 때가 아니고 공중파로 하던 시절이라 중요 경기 혹은 인기 팀 경기가 주로 편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무등경기장의 관중들은, 아니 전국 어느 경기장이든, 관중들은 느긋하게 경기를 즐기지 않았다. 고함을 지르고,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때로는 실수하는 자기 팀 선수나 감독을 비난하면서, 세 시간이 넘는 동안 거의 불사르듯 경기를 보았다. 마치 유럽 축구 팀 응원단들이 90분 내내 절대로 자리에 앉지 않고 고함을 지르는 것과 같은 분위기였다.
다만 우리 관중들은 주로 앉아 있었다는 것만 달랐다. 당시 야구는, 어쩌면 스포츠라기보다는 전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컬러 티브이 화면에 비치던 당시 야구장의 황폐한 외야가 기억난다. 잔디라고는 하지만 듬성듬성 모 심어 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잘 갈무리되어 있지 않아 외야에서도 툭 하면 불규칙 바운드가 되어 외야수 머리 위로 공이 튀어 올랐다. 배수가 잘 안 돼 비만 오면 논바닥으로 변했다. 야구선수는 양말을 올려 신는데, 당시 그걸 ‘농군 패션’이라고 불렀다. 모내기 해 놓은 것 같은 엉터리 잔디구장에 비가 오면 질퍽거리는 내외야의 선수들은 정말로 김매기를 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새로 짓거나 리모델링한 경기장이 중계 화면에 잡힌다. 관중들은 훨씬 신사답고, 경기장에 절대 무얼 던지지도 않는다. 천천히 경기를 즐긴다. 그 모습이 보기 좋다. 그렇지만 자꾸 나는 80년대 논바닥 경기장과, 좁은 경기장인 까닭에 불펜도 따로 없어서 파울라인 옆에서 몸을 풀던 선수들이 생각난다.
무시무시한 아우라를 가진 선동열 선수도 물론이다. 그가 마무리투수이던 때, 몸만 풀면 상대방이 조급해져서 경기를 스스로 망친다던 일화가 있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괜시리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가 선동열 선수를 처음 본 건, 1980년 4월의 어느 날, 서울운동장 야구장이었다. 그는 광주일고 2학년 선발투수였다. 어쨌든 그의 불같은 강속구와 고개를 끄덕일 때의 여유 있던 그의 표정이 생각난다. 물론 절대로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게 우주의 물리다. 선동열 선수는 그렇게 내 기억에서만 열심히 공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음식 칼럼니스트>
옛날 무등경기장은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텔레비전으로 워낙 많이 보았다. 왜냐하면 해태가 늘 우승하기도 했고 최고 인기 팀이니 중계 편성도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전 경기가 스포츠 채널로 중계되던 때가 아니고 공중파로 하던 시절이라 중요 경기 혹은 인기 팀 경기가 주로 편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무등경기장의 관중들은, 아니 전국 어느 경기장이든, 관중들은 느긋하게 경기를 즐기지 않았다. 고함을 지르고,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때로는 실수하는 자기 팀 선수나 감독을 비난하면서, 세 시간이 넘는 동안 거의 불사르듯 경기를 보았다. 마치 유럽 축구 팀 응원단들이 90분 내내 절대로 자리에 앉지 않고 고함을 지르는 것과 같은 분위기였다.
다만 우리 관중들은 주로 앉아 있었다는 것만 달랐다. 당시 야구는, 어쩌면 스포츠라기보다는 전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컬러 티브이 화면에 비치던 당시 야구장의 황폐한 외야가 기억난다. 잔디라고는 하지만 듬성듬성 모 심어 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잘 갈무리되어 있지 않아 외야에서도 툭 하면 불규칙 바운드가 되어 외야수 머리 위로 공이 튀어 올랐다. 배수가 잘 안 돼 비만 오면 논바닥으로 변했다. 야구선수는 양말을 올려 신는데, 당시 그걸 ‘농군 패션’이라고 불렀다. 모내기 해 놓은 것 같은 엉터리 잔디구장에 비가 오면 질퍽거리는 내외야의 선수들은 정말로 김매기를 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새로 짓거나 리모델링한 경기장이 중계 화면에 잡힌다. 관중들은 훨씬 신사답고, 경기장에 절대 무얼 던지지도 않는다. 천천히 경기를 즐긴다. 그 모습이 보기 좋다. 그렇지만 자꾸 나는 80년대 논바닥 경기장과, 좁은 경기장인 까닭에 불펜도 따로 없어서 파울라인 옆에서 몸을 풀던 선수들이 생각난다.
무시무시한 아우라를 가진 선동열 선수도 물론이다. 그가 마무리투수이던 때, 몸만 풀면 상대방이 조급해져서 경기를 스스로 망친다던 일화가 있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괜시리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가 선동열 선수를 처음 본 건, 1980년 4월의 어느 날, 서울운동장 야구장이었다. 그는 광주일고 2학년 선발투수였다. 어쨌든 그의 불같은 강속구와 고개를 끄덕일 때의 여유 있던 그의 표정이 생각난다. 물론 절대로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게 우주의 물리다. 선동열 선수는 그렇게 내 기억에서만 열심히 공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음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