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사이다는 없다 -서미애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
2021년 04월 22일(목) 07:00
속이 답답할 때, 냉장고에서 막 꺼낸 사이다를 마시면 이를 데 없이 시원하다. 시원하긴 하지만 자주 마시면 그게 몸이 좋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운동선수나 식이요법 중인 사람은 탄산음료를 멀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더워지는 여름날이면 얼음 잔에 담긴 사이다 한 잔 생각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이다 캔을 막 땄을 때 나는 소리, 그걸 컵에 따를 때 나는 탄산 터지는 소리만 들어도 마음속까지 청량해지는 기분이 든다. 역시 속이 답답할 때는 사이다다. 설령 그것이 몸에 조금 안 좋다 하더라도.

‘사이다 서사’라는 말이 있다. 답답한 구석 없이 시원하게 줄거리가 진행되고 사건이 해결되는 이야기를 뜻할 것이다. 눈엣가시 같은 악역이 있을 때, 공분을 사는 악당이 활개 칠 때, 사이다 서사는 빛을 발한다. 사회적 합의와 법적 판단에 따른 징벌은 사이다는커녕 밍밍한 생수쯤 될 것이다. 그마저 목을 축이면 다행이다. 현실에서 악행은 드라마보다 광범위하고 교묘하다. 현실에서 복수는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언제나 한 발 늦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적 복수를 꿈꾼다. 많은 이야기는 이와 같은 사람들의 판타지를 해소하는 데 적극적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선다. 그래야 사이다를 마신 듯 감탄사를 뱉으며 시원해 한다.

최근에는 특히 학교 폭력 문제를 다룰 때 사이다 서사가 효과적인 듯하다. 올해 상반기 인기작인 ‘경이로운 소문’에서 초반 악역은 같은 학교 학생들을 괴롭히는 소위 ‘일진’들이었다. 드라마에서 학교의 시스템과 어른의 간섭은 어디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수가 다수를 향해 행하던 무소불위의 폭력은 주인공이 그들보다 더 큰 힘을 획득해 그들을 때려눕힐 때까지 계속된다.

카메라는 때리는 주인공과 맞는 악역의 액션을 집요하고 실감 나게 보여 주었다. 교복을 입은 악역들은 그야말로 죽기 직전까지 맞는다. 현재 방영 중인 ‘모범 택시’는 대놓고 ‘사적 복수 대행’을 표방한다. 첫 번째 복수는 역시 학교 폭력이었다. 복수는 함정과 계략을 통해 협박으로 완성된다. 지상파답게 가해자들이 폭행당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김빠진 사이다’라는 평도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추리소설 작가 서미애의 신작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에도 누군가는 위와 비슷한 평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다를 위해서는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 사건에 휘말린 인물의 심리, 사건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풍경은 되도록 납작해질 테지만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는 도리어 이런 것들에 충실하다. 시작은 마찬가지로 학교 폭력이다. 따돌림과 폭행에 시달리던 피해자는 급기야 죽음에 이르고 만다. 가해자 무리는 시신을 유기하고 증거를 은폐한다. 피해자는 실종이 아닌 가출로 처리되고,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가해 사실은 없던 일이 되려 한다. 주인공 하영이 동굴에서 죽은 학생의 가방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학교 폭력에 관한 소재로, 흔히 기대하는 사이다 서사와는 거리가 멀다. ‘하영 연대기’ 3부작의 2부인 만큼 전작 ‘잘 자요 엄마’에 이어 심리적 갈등과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는 전통적 추리소설 혹은 범죄소설에 가깝다 할 것이다. 소설에서 가해자들은 하영에 의해 처단되지만, 악행에 걸맞은 폭행을 가하는 사적 복수의 형태는 아니다. 소설은 처음부터 복수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듯, 가해자와 가해자의 가족, 가해자와 정서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 하영의 마음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스스로 사이다 서사가 될 수 없다. 탄산음료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쌉싸름한 허브티에 가까울 것이다.

사람들이 사이다 서사를 원하는 이유는 현실이 답답하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 폭력이 최근 서사물에서 자주 다뤄지는 이유는 현실에서 학교 폭력이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현실의 학교 폭력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기에 사적 복수가 시원한 사이다로 변모한 것이다. 하지만 다시 현실에서 사이다는 그저 음료수일 뿐 어떤 해결책도 우리에게 제시하지 못한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의 결과만 낳을 뿐이다.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에서 하영은 스스로를 지킬 무기를 가방 속에 넣고 다니지만, 결정적 순간까지 그걸 꺼내어 쓰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사이다는 되지 않았으나, 성장소설이자 추리소설의 미덕을 갖게 되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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