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마음으로 짓는 밥 한 공기
2021년 04월 20일(화) 23:00
급식소에서 줄을 선 사람들이 투덜댄다. 배식이 늦어지고 있다. 까치발을 하고, 배식 준비에 바쁜 식당 여사님들을 바라보니 모두 손길이 분주하다. 자세히 보니, 한 분이 보이지 않는다.

학교 급식은 4교시 타종 전까지 배식 준비를 끝내야 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식사를 준비하는 여사님들 손길이 분망하다. 밥을 받으며 그분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살짝 미소를 보낸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오만하다. 최소한 시선은 맨 아래에 두어야 한다. 밥을 받고자 고개를 숙일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마음이야 헤아릴 줄 몰라도 손과 발은 볼 줄 알고, 몸 여기저기에 남은 흉터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어린 시절, 하굣길은 늘 배가 고팠다. 우리 집 굴뚝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난 달리기 선수처럼 헐레벌떡 정재로 뛰어들곤 했다.

“엄마! 밥”

하고 달려가면, 솥에서 밥이 끓었고, 수증기 너머로 어머니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나를 반겼다.

“밥 먹자.”

우린 모두 밥상에 동그랗게 앉아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밥을 먹었다. 그리고 배가 부르면 마음도 밥처럼 따뜻해졌다. 언제 들어도 좋은 소리가 “밥 먹자”는 말이고, 가장 따뜻한 손길은 ‘밥 한 그릇 내미는 손’이었다.

밥 한 알이 귀신 열을 쫓는다고 했다. 밥 한술이면 보약이 따로 없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자기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자식 목구멍으로 밥 들어가는 소리란다. ‘밥알 하나에 땀이 일곱 근 반’(공광규 ‘할머니의 지청구’)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밥보다 중한 것이 없고, 임금의 하늘이 백성이라면 백성의 하늘은 밥이다는 말도 틀림이 없다.

그런데 아무리 밥이 중요할지라도 그 누군가 밥 짓는 수고로움이 없다면 우린 그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농부들의 땀과 밥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밥 짓는 이의 노고는 까마득히 잊고 살아간다. 내 앞에 밥이 차려지기까지 누군가 찬을 준비하고 국을 끓이고 쌀을 씻고 뜸을 들였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한여름에도 펄펄 끓는 불과 씨름하고, 한겨울에는 차가운 물에 손을 넣었을 것이다. 지글지글 끓는 물과 이글이글 타는 불 없이 밥이 상 위에 오를 수는 없다.

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정작 우리는 밥 짓는 사람의 노고를 잊고 살아간다. 지금까지 하루 세끼, 새참까지 끼니를 거르지 않고 먹었을 것이다. 그 많은 끼니 중 어느 한 끼니도 불필요하게 넘긴 적 없으면서 여태 나를 위해 밥을 해준 아내나 어머니, 식당 이모에게 고맙다고 말해 본 적이 없다.

한 끼라도 굶으면 잠을 못 자고, 세끼를 굶으면 군자라도 담을 넘는다는 밥. 먹는 데는 십 분이면 족하지만, 짓는 시간은 넉넉히 열 배 스무 배는 더한 밥. 밥 한 그릇이 놓이기까지 흥건히 땀을 흘렸을진대, 나는 따뜻한 밥을 먹고는 인색하게 야박하게 입을 싹 씻어 버리기 일쑤였다. 밥값을 냈다는 오만함으로, 매일 먹는 일상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우린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자유와 이상을 논하며 고고한 척 살아가지만, 그 누구도 밥 앞에서 비루해지지 않는 이가 없고, 또 고개를 숙이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고 몰래 내 밥에 독약을 넣는다면 어떨까. 독살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산 고종은, 본인 앞에서 딴 캔이나 깬 달걀만 먹었다고 한다. 거기에 비하면 우린 아무 식당에나 들러 밥을 시키고 의심 없이 숟가락을 드니 이 또한 얼마나 무지하고 무모한 일인가.

그런데 간혹, 돌 하나 씹혔다고 밥 짓는 이를 원망하고, 머리카락 하나 나왔다고 온갖 법석을 떨고 악다구니까지 질러 대며 밥 짓는 이를 째려보고 분노하지 않는가.

수백 명의 식사를 몇 명이 준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밥 짓는 일은 물과 불로 시작해서 불과 물로 끝날 만큼 힘들고 위험한 극한 직업이다. 밥 한 그릇에 땀이 반 말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다.

밥을 먹고 나오면서 급식소 여사님께 슬쩍 물어보았더니, 한 분이 불에 데어서 급히 병원에 가셨단다. 마음이 애잔해진다. 흉터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음의 화상인지 모른다. 국에 덴 놈 냉수 보고도 놀란단다. 밥은 불이 아니라 밥 짓는 이의 뜨거운 마음, 전기나 가스의 뜨거운 불보다 밥 짓는 이의 사랑과 열정으로 익는 것이다. 여사님들의 퉁퉁 불어 터진 손과 발,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과 발을 본다. 그분들의 사랑과 희생이 식판 가득 늡늡한 웃음 한 근, 사랑 한 그릇으로 담기는 것이다.

오늘 식탁에 앉아서 어떤 반찬이 나올까, 맛은 어떨까 하는 비루하고 천박한 혀를 버리고, 밥 짓는 이의 수고로움에 감사하며 ‘마음 반 근’으로 숟가락을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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