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레깅스 디스토피아’
2021년 03월 05일(금) 07:00
산속에 살다 보니 광주 시내조차 나갈 일이 거의 없는 무등산 촌놈이 실로 오랜 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다. 흑석동 달마사에서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남산과 여의도, 굽이치는 한강이 눈 아래로 펼쳐지지만, 최근에 생겨난 거대한 빌딩들에 밀려 모두 예전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아침 햇살 속에 위용을 드러내는 강남 방면의 서울이야말로 가장 지금의 서울다운 모습이다. 그것은 마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지하 요새 도시인 제3 신동경시를 연상케 한다. 밤새 이어진 사도의 치열한 공세를 버텨 내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지상으로 솟아오르는 제3 신동경시는 아침 햇살과 미세먼지를 배경으로 연회색 스카이라인을 저 멀리 희미하게 그려내는 서울의 강남과 매우 흡사하다. 내게 80년대의 암울했던 서울이 추억이듯, 2020년대의 디스토피아적인 서울도 누군가에게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멀리서 바라본 서울은 디스토피아적이지만, 가까이에서 접하는 서울은 매우 젊다. 젊은 사람들만 눈에 들어온 건지 아니면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들어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젊고 잘 차려입었다. 일단 젊은 여자들이 입는 바지는 기본적으로 몸에 꽉 끼는 스타일이고, 레깅스도 심심찮게 보인다. 산속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들이라 무척 신선하다. 그러나 처음의 신선함은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빛바래고 무덤덤해졌다.

하긴 코로나19 때문에 무등산 등산로에서도 레깅스 차림의 젊은 여성들을 심심찮게 만나곤 한다. 맞은편에서 오는 경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앞서가는 경우엔 조금 난감하다. 이런 경우엔 추월하는 것으로 어색한 상황을 넘기곤 한다. 그런데 요즘 일부 젊은 남자들은 레깅스 입은 또래 여성을 봐도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 ‘인간의 DNA가 불과 몇 십 년 만에 변하기라도 한건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 서울에서 반나절을 지내보니 저절로 수긍된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 먹었다. 등산길에서 레깅스 입은 여성을 뒤따라 가는 것은 길거리에서 레깅스 여인을 그냥 지나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하철 맞은 편 자리에 레깅스 입은 여성이 앉아 있는 경우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역시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요즘 지하철 승객들은 맞은 편에 누가 앉았는지 전혀 관심 없다. 한결같이 고개를 숙인 채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미리 서로 짜고 몰래 카메라라도 찍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하철 내부 풍경은 일관적으로 작위적이어서 한편의 행위예술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예전의 일상적인 지하철 풍경이었던 눈감고 조는 척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당연히 맞은편에 레깅스 여인이 앉든 말든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다.

서울은 스마트폰에 점령당했다.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SF영화의 한 장면이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멋진 신세계’류의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세련된 ‘1984’류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SF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를 살고 있다. 21세기야 말로 흄, 칸트, 혹은 니체 같은 철학자가 등장하여 스마트폰으로부터 인간 정신을 탈환하여야 하나, 우리 주변엔 인문학을 사고파는 장사치들 밖에 없다. 이천년 이상을 인류와 함께 한 불교 역시 기복 신앙과 명상 비지니스의 협공으로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21세기 인류에게 미래를 제시한 것은 ‘공각기동대’ ‘블레이드 러너’ 같은 20세기의 SF영화였다. 이들이 제시한 미래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한때 인간은 신화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였다. 그 후 종교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았고, 곧이어 철학과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듯하다가, 이제 인간은 영화, 유튜브 동영상 같은 가공된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 세상을 보고 이해한다. 이들은 현대판 신화이다. 첨단 기술을 등에 업은 현대판 신화의 현란한 상상력이 치밀하고 끈질긴 사색과 통찰을 가볍게 지르밟고 있다.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레깅스 차림의 늘씬한 여인보다 손바닥 만한 화면 속의 섹시한 여성에게 정신이 팔려 있다.

다시 산속으로 돌아와 지난 며칠을 돌이켜 보니 SF영화를 한 편 본 것 같다. 레깅스가 내게 보여 준 디스토피아는 애써 모른 채 지나치기를 바랐던 우리 시대의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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