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호 신부·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언제까지 죽어야만 하는 것인가
2021년 02월 19일(금) 08:00 가가
지난 2016년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혼자 수리하던 외주업체 직원 한 명이 사망하였다. 사망한 직원은 열아홉 살의 사회 초년생이었다. 이 사건은 숨진 청년의 소지품에서 점심으로 먹을 컵라면이 발견되면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지식인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쓴소리를 내뱉었고, 서울 지하철 관계자들은 그 책임에 따라 직위 해제되거나 사표가 수리되는 등 파장이 컸다. 비정규직에 대한 큰 변화의 물결이 다가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가 아물 듯 잊히고 있다. 그리고 비정규직의 사망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 씨의 사망 사고도 그렇다. 생전 모습이 사진 속에서 아직도 생생한 김용균 씨는 사망 당시 스물네 살이었고, 비정규직 노동자였으며, 소지품에서 또한 먹지 못한 컵라면이 발견되었다. 이 사망 사건의 파장도 매우 커 태안 지역 경제가 침체될 정도였다. ‘이제는 변화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부는 물론 지자체에서도 비정규직에 대한 처우 개선 약속과 함께 재발 방지를 거듭 약속했다. 그런데 이 또한 시간이 흘러 점점 잊혀졌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 두 청년들의 죽음은 진정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지난 1월 혹독한 한파가 몰아치던 때, 유촌동 광주천변 다리 밑 공터에서 한 분의 노숙인이 얼어 죽었다. 갑작스런 노숙인의 죽음으로 광주시는 물론 지역구청과 시의회에서도 이런 저런 말들이 오갔다. 그리고 종합적 전수 조사와 방지 대책을 철저히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왜냐하면 광주시에는 노숙인을 위한 수용시설이 두 곳이나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숙인이 동사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누가 죽어야 사람들은 놀라고 그에 대한 방지책들을 만들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계속되는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노숙인의 죽음 또한 설 명절을 지낸 우리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지는 것은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리고 내놓은 대책들은 정말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릴 수 있는 것일까?
구의역 청년과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씨, 노숙인의 죽음은 잇따라 파장을 일으켰고 그에 따라 변화를 가져오기는 했다. 그런데 그 변화가 참 슬프다. 발에 신발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신발에 발을 맞추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정규직의 죽음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관료제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 무감각해지는 것이 무서울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그저 하나의 이용 가치에 불과하기 때문에 죽어도 되는 존재인가?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담은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이 같은 일들이 허다하다. 예수 시대의 기득권들은 하느님의 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고,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법인 십계명으로 사람들을 옥죄었다. 그래서 사람이 죽든 말든 상관치 않았고 안식일과 같은 규정을 지키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망각했다. 하느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 기득권 안에 숨겨진 것은 항상 돈과 같은 재물이었다.
코로나가 확산하는 엄중한 시기인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계약직이라는 규정은 고용자들에게 있어서 꿀단지와 같다. 언제든 내칠 수 있기에 그렇다. 계약직에 속한 이들에게 최저임금이라는 족쇄를 채워 사지로 떠미는 것이다. 이 사회의 구조적인 악은 많은 사람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사야서 42장 3절에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주님의 종’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한 말씀이다. 누가 죽어야만 대책을 마련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구의역 청년과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씨, 노숙인의 죽음은 잇따라 파장을 일으켰고 그에 따라 변화를 가져오기는 했다. 그런데 그 변화가 참 슬프다. 발에 신발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신발에 발을 맞추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정규직의 죽음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관료제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 무감각해지는 것이 무서울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그저 하나의 이용 가치에 불과하기 때문에 죽어도 되는 존재인가?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담은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이 같은 일들이 허다하다. 예수 시대의 기득권들은 하느님의 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고,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법인 십계명으로 사람들을 옥죄었다. 그래서 사람이 죽든 말든 상관치 않았고 안식일과 같은 규정을 지키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망각했다. 하느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 기득권 안에 숨겨진 것은 항상 돈과 같은 재물이었다.
코로나가 확산하는 엄중한 시기인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계약직이라는 규정은 고용자들에게 있어서 꿀단지와 같다. 언제든 내칠 수 있기에 그렇다. 계약직에 속한 이들에게 최저임금이라는 족쇄를 채워 사지로 떠미는 것이다. 이 사회의 구조적인 악은 많은 사람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사야서 42장 3절에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주님의 종’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한 말씀이다. 누가 죽어야만 대책을 마련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