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 생각’] 한해의 풍요를 기원하며 피어나는 꽃
2021년 02월 17일(수) 18:25
남녘의 꽃 소식이 한창이다. 매화는 물론이고 복수초도 이미 눈 속에서 노란 꽃을 피웠다. 봄의 전주곡이다.

모든 색은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나온다고 주장한 이는 괴테다. 그는 자연과학 분야의 저작인 ‘색채론’에서 긴 겨울을 깊은 땅 속에서 보낸 식물들은 흰색과 노란색을 띤다고 했다. 덧붙여 “노란색은 아주 순수한 상태에서는 언제나 밝음의 성질을 수반하여 명랑하고 활발하며, 부드럽게 매혹시키는 속성을 유지한다”고 했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보태어 “경험상으로 볼 때 노란 색은 전적으로 따뜻하고 안락한 인상을 준다”고 썼다.

괴테의 관찰대로 이른 봄에 피어나는 꽃 가운데에는 흰색과 노란색이 가장 많다. 노루귀·너도바람꽃·매화·목련의 꽃이 흰색이며, 복수초·수선화·개나리·영춘화·산수유 꽃이 다 노란색이다.

이즈음 한창 노란 꽃을 피우는 나무 가운데 풍년화라는 나무가 있다. 그리 흔한 나무는 아니지만, 식물원과 수목원을 비롯해 중부 이남의 정원에서는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무다. 풍년화는 무엇보다 꽃이 독특해 눈길을 끈다. 넉 장의 가느다란 꽃잎이 삐뚤빼뚤 꼬인 리본처럼 조롱조롱 피어나는 꽃은 봄에 피어나는 여느 나무에서처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난다. 꽃송이 하나하나는 작고 성기지만, 다른 나무들이 꽃봉오리조차 피워 올리지 않은 무채색의 겨울 숲에서 화려한 노란색 꽃을 나뭇가지 전체에 한꺼번에 피워 올리기 때문에 단연 이즈음에 숲의 주인공이 된다.

이 나무에 풍년화라는 특별한 이름이 붙은 건 살림살이를 더 풍요롭게 하고 싶었던 옛 사람들의 소망이 담겼기 때문이다. 풍년화 꽃이 피어나면 농부들은 한 해 농사를 채비해야 한다. 겨우내 묵혀 둔 농기구를 손질하고, 새로 심을 씨앗을 보살피는 건 물론이고,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 잔치를 벌이기까지 한다.

더 평안한 마음으로 한 해의 노동을 시작하기 위해 농부들은 농사의 미래, 즉 노동의 결과를 미리 알고 싶었다. 기왕에 고된 노동을 쏟는 농사일의 결과가 풍년이기를 바랐다. 이 때문에 농촌마다 풍년을 점치게 하는 나무와 관련한 민간의 믿음이 다양하게 전한다. 이른 봄에 느티나무 잎이 한꺼번에 돋아나거나 모내기철에 이팝나무의 꽃이 활짝 피어나면 풍년이 든다고 생각했다.

이른 봄에 가장 먼저 꽃 피우는 풍년화에도 농부들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겼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모습으로 피어나는 풍년화 꽃을 사람들은 상서로운 조짐으로 받아들였다. 야릇한 모양의 풍년화 꽃이 일찌감치 예쁘게 피어나면 올 농사에는 풍년이 들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를 바라보며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아예 이 나무를 ‘풍년화’라 부르게 됐다. 풍년화의 개화를 기다리는 건, 풍년을 기다리는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기다림 끝에 피어나는 꽃을 보고 농부들은 위안을 받았고, 들녘을 향하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울 수 있었다. 나무에는 그렇게 사람살이의 소망이 스며들었다.

이 나무에 풍년화라는 이름을 먼저 붙인 건 일본의 농부들이었다. 그들은 이 나무를 풍년을 뜻하는 그들의 언어인 ‘망사꾸’(まんさく, 万作)라고 부른다.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의 소망은 그들이라 해서 다를 바 없다. 풍년화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31년이다. 서양에서는 이 나무를 수맥 탐사에 요긴하게 쓴다고 해서 ‘마법의 개암나무’(Witch Hazel)라고도 부른다.

봄 마중과 함께 지난해의 고통을 씻어 낼 수 있을 듯한 좋은 신호들이 우리 곁에 다가오는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날마다 발표되는 코로나 감염병 확진자 숫자는 요지부동이다. 안심할 단계가 아니다. 봄 마중은 더 신중해야 한다.

남녘에서 재우쳐 건네 오는 풍년화의 화려한 개화 소식을 받아들면서, 옛 사람들의 믿음처럼 올 한 해 살림살이는 지난해의 침잠을 이겨 내고 한없이 풍요로워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괴테의 말처럼 ‘따뜻하고 안락한 인상’을 담고 피어나는 풍년화 개화 소식이 더 반가운 겨울의 끝자락, 봄의 들머리다.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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