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과 ‘응답’
2021년 01월 15일(금) 09:00 가가
가톨릭교회에서 사제나 수도자로 살아가려는 이들은 ‘부르심’과 ‘응답’이라는 단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가톨릭 신자 중에 ‘부르심’을 받아 진실하게 응답하여 사제와 수도자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부르심’은 성소(聖召: 거룩한 소명)라고도 하며, 성소를 받은 이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겠다고 응답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살겠다고 응답한 이들을 하느님의 사람, 봉헌된 사람이라고 한다. 봉헌된 사람! 하느님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한 사람,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사람이고 봉헌된 사람이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실 때 제자들을 부르신다. 이때 제자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즉시 예수를 따라나선다. 그런데 복음서는 그 제자들에게 어떤 행동이 항상 수반되고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라는 말씀이 부르심과 응답 후에 일어나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결국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은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리고 제자의 삶을 살게 된다. ‘부르심’에 ‘응답’으로 선택했으니 하느님의 사람이 걸어가는 길에 불필요하거나 쓸데없는 것들은 당연히 버리는 것이다. 선택했으니 그 선택에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포기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쇄신한다는 의미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께 맡긴다는 것이다.
‘부르심’과 ‘응답’의 과정을 통한 선택과 집중의 삶이 비단 가톨릭 신앙 안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여타 종교의 성직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고, 또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또는 결혼 생활을 시작하려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선택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일 수 있다. 서로를 부르고 찾게 되고 그에 응답하여 선택하게 되는데, 이 선택을 집중하여 소중한 가정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사랑과 헌신, 이해와 배려, 존중과 인내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바꾸어 나가려는 우리 모두의 선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직자로 살아가기 위한 ‘부르심’과 ‘응답’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다만 이 ‘부르심’과 ‘응답’ 사이에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인간관계 안에서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삶의 가치들이 담겨져 있다. 순수함과 정직함과 정의로움이 소중한 가치로 자리하여 우리의 삶을 보다 나은 모습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겠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 나만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한 이기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 종교 사이도 마찬가지다.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시각과 공격은 자신들 스스로가 신앙인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기 종교 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고 해서 잘못됐다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믿는 것이 최고라고 말하면서 그에 응하지 않는 이들에게 매우 공격적이고 배타적이다. 더 나아가 이 시대에 신앙의 삶을 살도록 이끄는 각 종교들이 사회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불신을 조장하고 서로를 단절시킨다면 과연 그것이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부르심’을 받아 응답하는 봉헌된 사람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자신을 포기하기 위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을 이용하고 속이거나, 천박한 자본주의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다면, 그들은 자기 종교의 신을 이용하는 것이고 세상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기꾼에 불과하다. 말은 거룩하게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그 스스로의 말과 행동과 삶이 세상을 단절시키고 불신을 조장하며 배타적인 시선을 만들어 낸다면, 그 거룩함은 거짓된 거룩함이고 세상을 더럽힐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겠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 나만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한 이기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 종교 사이도 마찬가지다.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시각과 공격은 자신들 스스로가 신앙인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기 종교 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고 해서 잘못됐다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믿는 것이 최고라고 말하면서 그에 응하지 않는 이들에게 매우 공격적이고 배타적이다. 더 나아가 이 시대에 신앙의 삶을 살도록 이끄는 각 종교들이 사회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불신을 조장하고 서로를 단절시킨다면 과연 그것이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부르심’을 받아 응답하는 봉헌된 사람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자신을 포기하기 위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을 이용하고 속이거나, 천박한 자본주의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다면, 그들은 자기 종교의 신을 이용하는 것이고 세상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기꾼에 불과하다. 말은 거룩하게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그 스스로의 말과 행동과 삶이 세상을 단절시키고 불신을 조장하며 배타적인 시선을 만들어 낸다면, 그 거룩함은 거짓된 거룩함이고 세상을 더럽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