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단재 신채호는 어디 있는가?
2020년 11월 12일(목) 07:00 가가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를 들라면 대부분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을 꼽을 것이다. 김부식을 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에게는 ‘사대주의자’란 부정적 인식도 함께 따라다닌다. 반면 단재에게는 조국의 자주독립과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일생을 바쳤다는 인식이 있다.
단재는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려고 1928년 5월 일제가 점령한 대만 기륭항(基隆港)에 갔다가 체포되어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여순(旅順)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36년 2월 뇌일혈로 순국했다. 그의 유해가 경성역에 도착하자 지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무릅쓰고 모여들었다. 민세 안재홍(安在鴻:1891~1965)은 “살아서 산하를 등졌고, 죽어서 고원(古園)에 되돌아오니 인세(人世)의 비극이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역시 역사학을 공부했던 안재홍은 신채호에 대해 ‘조선사학의 선구자’라고 평했다.
춘곡 원세훈(元世勳:1887~1959) 역시 단재를 ‘현 조선에서 유일한 사학가’라고 평했다. 희대의 천재였으나 잘못된 시대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신채호. 역사학자 신채호가 걸었던 ‘인세의 비극’은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과 동시에 ‘민족의 희망’으로 부활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특히 한국 역사학계에서 그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남한의 역사학계를 장악한 이른바 강단 사학은 늘 총론으로 “식민 사학을 극복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현 조선에서 유일한 사학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은 강단 사학의 정설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수를 헬 수 없는 수많은 대학 사학과 중에서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을 가르치는 사학과는 한 군데도 없다. 총론으로는 늘 “식민 사학을 극복했다”고 말하지만 본론으로 들어가면 ‘식민 사학’을 되풀이하는 것이 광복 75년째 계속되는 풍경이다.
국가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 한국학진흥사업단이란 것이 있다. 연간 수백억 원의 국고를 쓰는 이 사업단의 단장이란 사람이 과거 공개 학술대회 석상에서 ‘단재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분야 같으면 나라가 뒤집어질 정도로 시끄러웠겠지만 남한 역사학계는 이 망언에도 조용하기만 했다. 시진핑의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망언에도 남한 강단사학계가 일제히 침묵했던 것은 이 러한 구조 때문이다.
그럼 북한의 역사학계는 단재 신채호를 어떻게 대접하고 있을까? 북한의 역사 전문 학술지였던 ‘력사제문제’에 정현이라는 역사학자가 17호(1950년)에 ‘한사군고’(漢四郡考)를 실었다. 그는 한사군은 지금의 북한 지역이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면서 “(신채호는) 패수를 지금 (요녕성) 해성현에 있는 헌우락(軒芋樂)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탁월한 고찰 방법이다”라고 평가했다.
반면 남한의 강단 사학계는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선총독부의 학설을 따라서 한사군이 북한에 있었다고 우기고 있다. 북한 역사학자들은 단재 신채호와 국어학자였던 약연 김두봉(金枓奉:1889~1960)의 영향을 받아서 학설을 정립했다고 고백한다. 한데 남한 강단 사학자들은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스승들의 비위를 맞추며 자국사를 난도질했던 두계 이병도(1896~1989)와 치암 신석호(1904~1981)의 학설을 종교 교리처럼 신봉하고 있다.
이른바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은 물론 언필칭 진보라고 자칭하는 역사학자들도 이 두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져서 두 손 모아 칭송하기에 바쁘다. 그러니 정권 교체와 더불어 친일 역사학 해석 체계도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늘 실망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만큼 여야 정치권을 비롯해서 우리 사회 각계에 구축한 식민 사학 카르텔이 막강한 것이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설까지 끌어들여 퍼뜨리는 중이다.
우리 역사는 늘 민중들이 바꿔 왔다. 이 친일 식민 사학 카르텔을 깨기 위해서는 역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는 장삼이사들 즉 민중들이 깨어나서 외치는 방법 외에는 없다.
국가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 한국학진흥사업단이란 것이 있다. 연간 수백억 원의 국고를 쓰는 이 사업단의 단장이란 사람이 과거 공개 학술대회 석상에서 ‘단재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분야 같으면 나라가 뒤집어질 정도로 시끄러웠겠지만 남한 역사학계는 이 망언에도 조용하기만 했다. 시진핑의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망언에도 남한 강단사학계가 일제히 침묵했던 것은 이 러한 구조 때문이다.
그럼 북한의 역사학계는 단재 신채호를 어떻게 대접하고 있을까? 북한의 역사 전문 학술지였던 ‘력사제문제’에 정현이라는 역사학자가 17호(1950년)에 ‘한사군고’(漢四郡考)를 실었다. 그는 한사군은 지금의 북한 지역이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면서 “(신채호는) 패수를 지금 (요녕성) 해성현에 있는 헌우락(軒芋樂)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탁월한 고찰 방법이다”라고 평가했다.
반면 남한의 강단 사학계는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선총독부의 학설을 따라서 한사군이 북한에 있었다고 우기고 있다. 북한 역사학자들은 단재 신채호와 국어학자였던 약연 김두봉(金枓奉:1889~1960)의 영향을 받아서 학설을 정립했다고 고백한다. 한데 남한 강단 사학자들은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스승들의 비위를 맞추며 자국사를 난도질했던 두계 이병도(1896~1989)와 치암 신석호(1904~1981)의 학설을 종교 교리처럼 신봉하고 있다.
이른바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은 물론 언필칭 진보라고 자칭하는 역사학자들도 이 두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져서 두 손 모아 칭송하기에 바쁘다. 그러니 정권 교체와 더불어 친일 역사학 해석 체계도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늘 실망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만큼 여야 정치권을 비롯해서 우리 사회 각계에 구축한 식민 사학 카르텔이 막강한 것이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설까지 끌어들여 퍼뜨리는 중이다.
우리 역사는 늘 민중들이 바꿔 왔다. 이 친일 식민 사학 카르텔을 깨기 위해서는 역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는 장삼이사들 즉 민중들이 깨어나서 외치는 방법 외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