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一心)이 동(動)하면 정의(正義)가 되고
2020년 11월 06일(금) 00:05

김원명 광주원음방송 교무

“한 제자가 묻기를 ‘무시선(無時禪)의 강령 중 일심(一心)과 정의(正義)의 관계는 어떠하오며, 잡념(雜念)과 불의(不義)의 관계는 어떠하나이까.’ 답하시기를 ‘일심(一心)이 동(動)하면 정의(正義)가 되고, 잡념(雜念)이 동(動)하면 불의(不義)가 되나니라.’ 원불교 정산종사 법어(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인 정산종사의 법문과 제자들이 수필(受筆)한 법문들을 수록한 원불교 교서의 하나)에 나오는 말씀이다.

여기서 무시선 강령이란 다음과 같다. ‘육근(六根)이 무사(無事)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는 것이다. ‘육근’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가리키니 ‘육근이 무사하다’함은 쉽게 말해서 ‘심신(心身)에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는 잡념을 없애고 일심을 키울 것이며, ‘심신에 일이 있을’ 때는 불의를 없애고 정의를 기르라는 법문이다.

그런데 흔히 ‘일이 없으면 잡념을 없애고 일심을 양성하라’는 뜻은 대체로 이해한다지만, ‘일이 있으면 불의를 없애고 정의를 양성하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잘못 아는 수가 많다.

이 말씀의 뜻은 어떤 것일까? 만약 그 뜻이 ‘일이 있을 때는 그 일 하나하나에 대해 시비선악(是非善惡)을 잘 가려서 불의를 버리고 정의를 취하라’는 의미라면, 어떤 일에 있어서 정의와 불의를 쉽게 구분 할 수 없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를 들자면, ‘정당한 일은 죽기로써 하며, 부당한 일은 죽기로써 말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과거 식민지 시대에 거의 모든 백성이 일제(日帝)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종했던 것은 불의인가 아닌가? 또 ‘남의 잘못을 보고 자기를 반성할지언정 그 잘못을 드러내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남의 잘못을 숨겨서 좋은 것과 도리어 드러내야 좋은 것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지구 저편에 하루하루 병들고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많음을 보면서도 내 자식 교육을 위해 돈을 아껴두고 쓰지 않는 것은 정의인가, 불의인가?

이처럼 세상일이란 이쪽저쪽을 살펴볼 때 옳은 것과 그른 것의 한계를 명확하게 구분 짓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정의와 불의를 가려야 하는 것일까? ‘일심이 동하면 정의가 되고, 잡념이 동하면 불의가 되나니라’ 이 말씀이 바로 그에 대한 해답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심이란 ‘한 곳에 집주(集注)하는 마음’ 곧 ‘성성적적(惺惺寂寂)한 마음’을 뜻한다. 때문에 일심을 바로 알지 못하면 무시선법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떤 이치로 ‘일심이 동하면’ 정의가 되고, ‘잡념이 동하면’ 불의가 되는 것일까? 사람이 만약 천만 가지로 얽힌 생각을 모두 쉬고 분별주착(分別住着)을 내려놓으면, 저절로 자성의 지혜가 솟아나서 어떤 경계를 만날지라도 육근이 바르게 작용하니, 이것이 우리 안에 깃든 공적(空寂)한 성품의 작용으로써, 이른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현상이다. 이러한 성품의 작용은 곧 우주 만유의 본원인 진리의 체성(體性)에서 나오는 묘용(妙用)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시비선악에 초월하여 지극히 공정(公定)한 것이다. 그래서 ‘일심이 동하면 정의가 된다’고 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사람이 온갖 생각을 쉬지 못하여, 만나는 모든 경계마다 시비하는 마음과 분별 주착하는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면, 비록 올바른 행위를 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 ‘옳음’에 집착하여 제가 지은 공덕에 대한 상(相)을 놓지 못해서 참다운 정행(正行)이 되지 못하고, 혹여 선한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로 그 ‘선’에 집착하고 선한 공덕에 대한 상을 버리지 못하여 참다운 선행(善行)이 되지 못하니, 이는 스스로 아만(我慢)을 더하여 참다운 공덕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계에서든 오직 위와 같이 천만 가지 생각을 쉬고 분별 주착을 내려놓은 채 사물을 보아, 그 떠오르는 공적영지로써 일을 하는 것이 곧 참된 ‘정의의 실천’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금강경’에 있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곧 응당 텅 빈 마음이 되었다가 경계 따라 그 마음을 작용하라”는 법문도 위와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살아갈수록 생각할 것도 많고 시간이 갈수록 판단할 것도 많은 이때에 일심으로 정의를 양성하여 개인, 가정, 사회, 국가에 좋은 일만 가득한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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