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모든 것의 허용을 의미하는가?
2020년 05월 11일(월) 00:00 가가
중세시대도 아닌 오늘날, 누가 개인의 자유의지를 의심하거나 부정할 것인가.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는 삶에 대한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 당연시되는 주장도 따져 보면 그 의미가 모호해진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함께 밥을 먹을지, 차를 마실지를 결정하는 일상의 일도 굳이 말하자면 자유의지의 문제이다. 자유의지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나아가 이러한 선택에 따른 일련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방향과 이를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속에서만 자유의지의 의미는 실천적으로 드러나며 완성된다. 이런 고민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든 작가가 바로 러시아의 도스토옙스키이다.
자유의지는 도스토옙프스키에게 ‘무엇을 위한 삶인가?’ 하는 물음과 이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자유의지의 문제를 가장 깊이 있게 다룬 최고의 작품이 그의 유작이자 미완성으로 남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살해라는, 끔찍한 상황을 둘러싼 아들들의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어쩌자고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다룬 전당포 노파의 살인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아버지의 살해라는 상상조차하기 힘든 상황으로 독자들을 이끄는 것일까? 작가는 살인이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끔찍한 일이지만, 한술 더 떠 친아버지의 살해라는 극단을 통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곧 모든 것을 허용하는가?’를 묻는다. 이 문제는 둘째 아들인 이반을 통해서 대변되는데 큰아들 드미트리처럼 이반 역시 자신들에 대한 책임감을 조금도 보여 주지 않은 아버지를 증오한다.
이반은 신을 믿지 않으며, 설령 신이 있다고 한들 인간의 고통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없는 거나 매한가지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를 이반은 ‘대심문관’이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제시한다. 이반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수많은 모순을 조목조목 말한다. 특히 아무 잘못 없이 당하는 아이들의 고통과 희생을 근거로 신의 부정과 불신을 말하며, 신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역설한다.
신과 종교가 이미 오랫동안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어서 그리스도가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반의 말처럼 그리스도가 지상에 나타나자 대심문관은 당황해서 “왜 나타났는가? 세상을 방해하러 왔는가?”라고 물으며, 어서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말한다. 대심문관을 통해서 신을 추방함으로써 이반은 인간에게 이제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음을 주장한다. 누구나 자유로우며, 이 자유의지에 따라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서 도스토옙스키는 계속해서 이렇게 묻는다. 계몽과 이성으로 찾아낸 자유의지가 악마적 유혹과 마주했을 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는가? 자유의지가 교만과 결탁해서 삶을 관념과 논리로 왜곡할 때 그 위험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논리와 관념의 덫에 걸린 삶은 소외되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반은 얼굴을 모르는 막연한 인류는 사랑할 수는 있지만 가까운 이웃은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런 논리와 주장에 도취된 이반의 모습을 주변에서도 흔히 본다. 격렬한 대립과 증오의 궤변이 난무하고, 어제까지 함께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서로에게 격한 모멸과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향락과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모두가 힘들게 견디고 있는 상황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한다.
하지만 이반은 미래를 감당하지 못한다. 대신 작가는 막내아들 알로샤를 통해서 허무주의적 관념과 무책임하고 과잉된 자유의지를 넘어서는 삶에 대한 겸허와 믿음을 보여 준다. 바로 이런 알로샤가 희망을 향한 진정한 의지와 힘을 가진 것이다. 자유의지는 개인의 실현을 위한 절대적 조건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허용하는 한계 없는 자유의지는 곧 오만이며 절망이고, 그래서 악이다.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신과 종교가 이미 오랫동안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어서 그리스도가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반의 말처럼 그리스도가 지상에 나타나자 대심문관은 당황해서 “왜 나타났는가? 세상을 방해하러 왔는가?”라고 물으며, 어서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말한다. 대심문관을 통해서 신을 추방함으로써 이반은 인간에게 이제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음을 주장한다. 누구나 자유로우며, 이 자유의지에 따라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서 도스토옙스키는 계속해서 이렇게 묻는다. 계몽과 이성으로 찾아낸 자유의지가 악마적 유혹과 마주했을 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는가? 자유의지가 교만과 결탁해서 삶을 관념과 논리로 왜곡할 때 그 위험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논리와 관념의 덫에 걸린 삶은 소외되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반은 얼굴을 모르는 막연한 인류는 사랑할 수는 있지만 가까운 이웃은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런 논리와 주장에 도취된 이반의 모습을 주변에서도 흔히 본다. 격렬한 대립과 증오의 궤변이 난무하고, 어제까지 함께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서로에게 격한 모멸과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향락과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모두가 힘들게 견디고 있는 상황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한다.
하지만 이반은 미래를 감당하지 못한다. 대신 작가는 막내아들 알로샤를 통해서 허무주의적 관념과 무책임하고 과잉된 자유의지를 넘어서는 삶에 대한 겸허와 믿음을 보여 준다. 바로 이런 알로샤가 희망을 향한 진정한 의지와 힘을 가진 것이다. 자유의지는 개인의 실현을 위한 절대적 조건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허용하는 한계 없는 자유의지는 곧 오만이며 절망이고, 그래서 악이다.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