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을 추억하는 나는
2020년 05월 01일(금) 00:00 가가
‘죄와 벌’, ‘적과 흑’, ‘닥터 지바고’, ‘전쟁과 평화’ 같은 세계문학전집 속의 책들을 접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당시엔 집집마다 그런 장식용 전집류가 한두 질 정도 있었다. 방학 때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그런 책들을 읽었다
대학 시절, 운동권 써클 활동을 하면서 오직 사회과학 서적만 읽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회과학 서적만 찾아 읽었다. 소부르조아적인 소설 나부랭이 따위를 읽는 것은 혁명과 민중을 위해 헌신해야 할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들 모두 그걸 당연시했다.
대학을 떠나 20대 내내 공장들이 몰려 있던 영등포 일대의 자취방을 전전했다. 혼자서 살 여력이 되지 않아 둘 혹은 셋이 함께 살았다. 오갈 곳이 없으면 아는 사람 방에 빌붙어 살기도 했다. 80년대 고척동, 신정동 같은 영등포 주변 자취방은 다 고만고만했다. 시멘트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지저분하고 작고 어둡고 칙칙했다.
그런 자취방이었다. 박완서 선생의 소설책 한 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였다.
책을 집어 든 그 자리에서 쪼그리고 앉아 끝까지 다 봤다. 사회과학 서적과는 완전히 다른 독서의 매력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30대를 시작하며 영등포를 떠났다. 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을 다녔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반지하의 자취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회과학 서적이 아닌 책을 산 것도 그 무렵이었다.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노년의 선생이 담담하게 풀어내는 글들은 많은 위로가 되었다.
2012년인가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선생의 평전이 나왔다. 책 속에 제법 큰 브로마이드판으로 선생의 흑백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 사진을 내 방에 붙였다. 누군가의 사진을 내 방에 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약간 처진 눈으로 덤덤하게 웃고 있는 노년의 선생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면 선생이 평생동안 가슴 속에 품었던 아픔 같은 것이 전해지는 듯했다.
나이가 들어 눈이 시원찮아졌다는 핑계로 오디오북이라는 신문물을 접하기 시작했다. 오디오북을 뒤적이다 선생의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디로 갔을까’를 듣게 되었다.
일제시대 개성 근교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선생과 달리, 나는 60년대 초반 부산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누가 뭐래도 뼛속 깊이 도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둔 이부자리에 누워 유년시절을 추억하는 선생의 글을 차분한 여자 성우의 목소리로 듣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노년의 선생이 추억하는 유년시절이 애잔하게 내 안으로 스며든다. 이렇게라도 해야 가슴을 누르는 이 먹먹함이 사라질 것 같다.
스님들은 스님다운 스님, 참 중을 최고로 친다. 보조국사 종재일 같은 큰 행사날, 오랜만에 만나는 스님들은 여러 스님들의 안부와 일화를 차담거리 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 이야기는 그 스님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먼 훗날 보조국사 종재일에 모인 스님들이 혹시라도 나를 떠올리기라도 한다면, 아마도 나는 글 나부랭이나 쓰던 중으로 회자될 것이다. 스님들이 가볍게 입에 올려서 깎아내리기에 이만큼 좋은 소재도 없다. 하지만 후대까지 기억될 만큼의 이름값이 없는 나는 스님들의 차담거리가 될 일도 없을 터이니 나의 걱정은 괜한 기우일 뿐이다.
하긴 가슴 한구석에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부처님이나 큰스님이 아니라 소설가인 것만 봐도 내가 제대로 된 중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설령 후일 스님들이 나를 차담거리 정도로나 기억하더라도 할 말이 없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덕분에 나이 먹어서까지 제대로 된 중노릇 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니 천만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선생이 나를 당신의 소설에 등장시켰다면, 어떻게 묘사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역시 글쓰기만큼 좋은 치료제도 없다.
대학을 떠나 20대 내내 공장들이 몰려 있던 영등포 일대의 자취방을 전전했다. 혼자서 살 여력이 되지 않아 둘 혹은 셋이 함께 살았다. 오갈 곳이 없으면 아는 사람 방에 빌붙어 살기도 했다. 80년대 고척동, 신정동 같은 영등포 주변 자취방은 다 고만고만했다. 시멘트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지저분하고 작고 어둡고 칙칙했다.
30대를 시작하며 영등포를 떠났다. 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을 다녔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반지하의 자취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회과학 서적이 아닌 책을 산 것도 그 무렵이었다.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노년의 선생이 담담하게 풀어내는 글들은 많은 위로가 되었다.
2012년인가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선생의 평전이 나왔다. 책 속에 제법 큰 브로마이드판으로 선생의 흑백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 사진을 내 방에 붙였다. 누군가의 사진을 내 방에 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약간 처진 눈으로 덤덤하게 웃고 있는 노년의 선생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면 선생이 평생동안 가슴 속에 품었던 아픔 같은 것이 전해지는 듯했다.
나이가 들어 눈이 시원찮아졌다는 핑계로 오디오북이라는 신문물을 접하기 시작했다. 오디오북을 뒤적이다 선생의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디로 갔을까’를 듣게 되었다.
일제시대 개성 근교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선생과 달리, 나는 60년대 초반 부산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누가 뭐래도 뼛속 깊이 도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둔 이부자리에 누워 유년시절을 추억하는 선생의 글을 차분한 여자 성우의 목소리로 듣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노년의 선생이 추억하는 유년시절이 애잔하게 내 안으로 스며든다. 이렇게라도 해야 가슴을 누르는 이 먹먹함이 사라질 것 같다.
스님들은 스님다운 스님, 참 중을 최고로 친다. 보조국사 종재일 같은 큰 행사날, 오랜만에 만나는 스님들은 여러 스님들의 안부와 일화를 차담거리 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 이야기는 그 스님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먼 훗날 보조국사 종재일에 모인 스님들이 혹시라도 나를 떠올리기라도 한다면, 아마도 나는 글 나부랭이나 쓰던 중으로 회자될 것이다. 스님들이 가볍게 입에 올려서 깎아내리기에 이만큼 좋은 소재도 없다. 하지만 후대까지 기억될 만큼의 이름값이 없는 나는 스님들의 차담거리가 될 일도 없을 터이니 나의 걱정은 괜한 기우일 뿐이다.
하긴 가슴 한구석에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부처님이나 큰스님이 아니라 소설가인 것만 봐도 내가 제대로 된 중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설령 후일 스님들이 나를 차담거리 정도로나 기억하더라도 할 말이 없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덕분에 나이 먹어서까지 제대로 된 중노릇 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니 천만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선생이 나를 당신의 소설에 등장시켰다면, 어떻게 묘사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역시 글쓰기만큼 좋은 치료제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