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양(景陽)방죽의 추억
2020년 03월 30일(월) 00:00

[박 석 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우석대 석좌교수]

전라도 광주! 이제는 전라도 없이도 광주광역시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가 다 알아주는 도시이다. 백제 때부터 무진주(武珍州)라는 이름으로 불러 오던 고을, 수천 년이 지났으나 영원한 ‘빛의 고을’(광주)로 세상을 비춰 주는 역사의 땅이 되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광산(光山)이라 했다가 광주라 했다가 셀 수 없이 이름이 바뀌었다. 광주와 광산은 같은 고을로 이름만 바뀌면서 지내왔으나, 1935년에 중심부는 광주부로 나머지 지역은 광산군이라 칭하면서 두 개의 고을로 나뉘고 말았다.

1949년 광주부가 광주시로 승격되고 마침내 1988년 1월 광산군이 광주광역시 광산구로 편입되면서, 같은 이름 두 개의 고을은 끝내 하나의 고을로 합해지게 되었다. 때문에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찾다 보면 광산(光山)이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하는데, 결국 광주와 광산은 하나로 보아도 크게 차이가 없다고 여겨야 한다.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옛날의 잊히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고 싶을 때가 있다.

1950년대 말. 우리가 고등학교 학생 시절, 계림동에는 경양방죽이라는 큰 저수지가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경치로 꾸며진 곳은 아니었지만, 날씨가 좋은 날 지나다 보면 보트가 매여 있기도 하고, 누군가는 보트를 타면서 즐겁게 놀던 모습을 볼 때가 많았다. 요즘의 젊은이들이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시절의 경양방죽은 광주 시민의 휴식 공간이자 놀이터였다.

우리가 대학생이던 시절까지 경양방죽은 그대로 있었고, 전남대 앞에는 태봉산도 덩실하게 서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환경들이 개발독재 시대를 만나 하나씩 사라져 갔으니, 광주는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되고 말았다. 태봉산을 깎아서 경양방죽을 통째로 메우는 바람에 두 곳의 아름다운 풍광이 하루아침에 함께 없어지고 마는 운명을 맞았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5세에 결혼하여 서울에 살던 다산 정약용은 그 다음해인 16세에, 아버지가 전라도 화순현감으로 부임하자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와 3년의 세월을 보냈다. 형제이자 지기(知己)였던 둘째 형님 약전 형과는 서로 뜻이 맞아 화순의 뒷산 만연산 아래의 만연사 곁, 동림사(東林寺)에서 독서를 하면서 한창 학문에 힘쓰고, 과거 공부도 열심히 했었다. 1778년 봄. 18세이던 다산은 아버지의 명으로 형님과 함께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올라갔다.

“이런저런 나무들 큰길가에 늘어섰는데(雜樹臨官道)/ 역사(驛舍) 가까이에 저수지 아름답구나(芳池近驛樓)/ 얼굴 비춰주는 봄물은 아득히 멀고(照顔春水遠)/ 저문 구름 한가롭게 두둥실(隨意晩雲浮)/ 대밭 무성해 말 몰기 방해되고(竹密妨行馬)/ 연꽃 활짝 피어 뱃놀이 제격이로세(荷開合汎舟)/ 장엄하도다 저수지의 관개(灌漑) 공덕(弘哉灌漑力)/ 일천 이랑 논들에 물이 넘치네(千畝得油油)” 다산이 쓴 ‘과경양지’(過景陽池)라는 제목의 시다. “기해년(1778), 그때 둘째 형님과 함께 서울로 갔는데 2월이었다.(己亥 時與仲氏同赴漢陽 二月也)”라는 부침 글을 보면 화순에서 서울로 가느라 광주의 경양방죽을 지나가면서 읊었던 시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242년 전의 다산 시에서 우리는 광주의 옛 풍광을 넉넉하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금이야 경양방죽의 옛 자리에는 구시청이 있었고, 그곳은 태봉산을 깎아 온 흙으로 메꾸었으며, 또 시청은 지금의 상무지구로 옮겨가 버렸으니, 생각하면 아까운 거대 저수지 하나만 사라지고 만 셈이다. 또 그곳에는 경양역(景陽驛)이라는 역사가 있었기에 수많은 인파가 몰리던 곳이었고, 전남 일대에서 서울로 가려면 거쳐야 하는 목로주점이 즐비하던 곳이었다.

대밭이 우거져 말 타고 가는 행인에게 방해가 되고 연꽃이 피어 뱃놀이하기에 좋은 곳이었으니, 그 경치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웠을 것인가. 더더욱 놀라운 일은 그곳 저수지의 저수량이 너무 풍족해 광산군 일대의 논에 물을 넉넉하게 관개해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 저수지가 그대로 있다면 어떤 풍경일까를 상상해 보면 개발의 피해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금방 알게 해 준다. 안목 짧은 도시개발, 자연을 파괴하고 역사를 묻어 버리는 죄악, 오늘 누가 계림동 옛날 시청 자리에 경양역과 광주의 수자원인 경양방죽이 있었음을 알기라도 할 것인가. 나는 다산의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미래를 모르는 행정가들의 비극을 떠올리곤 한다. 다시는 그런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 우거진 숲의 태봉산, 넘실대는 경양방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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