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류된 일상의 배후에 대하여
2020년 03월 16일(월) 00:00 가가
‘코로나19’ 라는 파괴적 침입자가 공동체의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요즘, 늘 계속되리라 생각하는 일상이란 사실 얼마나 무너지기 쉬우며, 또 이를 지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절하게 경험한다. 일상은 매일 같은 속도와 방식, 조건으로 반복되는 평범한 일로 가득하다. 때로 일상은 내키지 않는 의무적 노동과 굴욕적인 인간관계, 궁핍한 현실과 박탈감으로 뒤범벅이 되기도 쉽다.
하지만 이런 일상에서 느닷없이 단절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일반적인 평범함’으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되는 것을 넘어서 이는 삶의 왜곡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상성이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 가는 과정의 토대이고 조건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과학과 의학이 풀어야 할 영역을 넘어, 일상이 왜곡된 저변과 배후에 대한 성찰적 이해 또한 중요하다.
“별이 총총히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하늘의 별빛이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헝가리의 철학자 게오르그 루카치(1885~1971)가 쓴 ‘소설의 이론’에 나오는 유명한 첫 문장이다. 그는 어두운 밤길을 가기 위해서 별빛 하나로 충분한 시대가 행복하고 평화로웠다고 말한다. 더구나 이 행복과 평화로움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공정하게 보장되는 것이다.
세계가 마치 자기 집처럼 편안함 아늑함을 주는 것은 인간의 내면과 하늘의 별들이 발하는 빛, 즉 인간의 길과 하늘의 길이 서로 일치한다는 믿음과 확신에서 생기는 감정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행복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렵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서조차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집이란 돈으로 사고파는 건축물만이 아니다. 신뢰 관계가 있고, 언제든 돌아갈 곳으로서의 장소,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조건으로서의 거주하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어제의 삶과 오늘의 일상이 무리 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오늘날 이런 일상성이 더 이상 담보될 수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더 나은 삶의 조건이 경쟁 능력에 있다는 믿음과 확신은 평온한 일상에 필요한 ‘집’의 의미를 거부한다. 그리고 집의 상실은 공유와 공존의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빛은 이제는 필요하지 않고 세계는 집이 아니라, 두렵고 불안한, 그리고 일상의 가치는 무효화되는 곳이다. 당연하게 배제된 사람들은 위로와 공감을 건네 주는 친절한 속삭임 앞에서 쉽게 마음을 열거나 무너진다.
소외와 왜곡을 통해서 주어진 일상성이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조건임을 다룬 작품으로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잡혀 와서 인간의 모습을 강요당하는 원숭이의 이야기다. 이 원숭이는 인간이 준 포도주를 마신 후 ‘페터’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우리에 갇힌다. 그 후 페테는 야생의 원숭이가 누리던 일상을 잃고, 인간의 흉내를 내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강변한다. “저에게는 출구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출구 없이는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살아남고자 하는 페터는 조련사를 통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길들여진다. 원숭이 페터의 말속에서 그가 당한 삶의 왜곡과 상처가 엿보인다. 그런데 페터가 자신의 삶을 상실한 채 다른 사람의 도구와 수단이 되는 모습이 혹시 우리가 처한 현재 상황의 배후에 대한 비유의 표현은 아닐까. 공동체의 안전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상과 결속을 지키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긴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손가락질과 증오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의 일상은 공유의 일상이다.
모두가 속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일상성에는 많은 문제와 과제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불신과 분노, 기피와 배제, 거부와 외면의 모습이 더 거세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함께 갈 먼 길이 있으니, 서로의 내부에 더 많은 심연을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런 일상성이 더 이상 담보될 수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더 나은 삶의 조건이 경쟁 능력에 있다는 믿음과 확신은 평온한 일상에 필요한 ‘집’의 의미를 거부한다. 그리고 집의 상실은 공유와 공존의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빛은 이제는 필요하지 않고 세계는 집이 아니라, 두렵고 불안한, 그리고 일상의 가치는 무효화되는 곳이다. 당연하게 배제된 사람들은 위로와 공감을 건네 주는 친절한 속삭임 앞에서 쉽게 마음을 열거나 무너진다.
소외와 왜곡을 통해서 주어진 일상성이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조건임을 다룬 작품으로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잡혀 와서 인간의 모습을 강요당하는 원숭이의 이야기다. 이 원숭이는 인간이 준 포도주를 마신 후 ‘페터’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우리에 갇힌다. 그 후 페테는 야생의 원숭이가 누리던 일상을 잃고, 인간의 흉내를 내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강변한다. “저에게는 출구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출구 없이는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살아남고자 하는 페터는 조련사를 통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길들여진다. 원숭이 페터의 말속에서 그가 당한 삶의 왜곡과 상처가 엿보인다. 그런데 페터가 자신의 삶을 상실한 채 다른 사람의 도구와 수단이 되는 모습이 혹시 우리가 처한 현재 상황의 배후에 대한 비유의 표현은 아닐까. 공동체의 안전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상과 결속을 지키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긴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손가락질과 증오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의 일상은 공유의 일상이다.
모두가 속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일상성에는 많은 문제와 과제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불신과 분노, 기피와 배제, 거부와 외면의 모습이 더 거세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함께 갈 먼 길이 있으니, 서로의 내부에 더 많은 심연을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