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허영과 전지적 태도에서 벗어나기
2020년 02월 17일(월) 00:00 가가
정확한 사실을 알기가 정말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일에 관한 자료를 찾다 보면 엉터리 정보는 물론 의도가 보이는 결정적인 왜곡도 자주 확인하게 된다. 이는 모든 것에 있는 ‘맥락’이라고 하는 앞과 뒤의 흐름이 끊겼기 때문이다. 맥락은 상황의 표면 뒤에 있는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한다. 그래서 맥락을 끊고 엉뚱한 것으로 채우거나 비틀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우리가 대화하고 글을 읽는 이유는 서로 생각을 전하고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말의 쓰임새가 본래의 역할을 벗어나면 궤변과 조롱, 가치 판단의 독선, 도덕성의 지적에 집중하면서 본질은 가려진다.
이런 식의 대화나 언어 사용의 밑바닥에는 애써 보려 하지 않아도 깊게 자리 잡은 거대한 지적 허영이 있다. 지적 허영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른 채 거꾸로 상대방의 무지를 훈계하고 계몽하려는 과도한 열정과 욕망이다. 이 지적 허영은 무지는 심각한 결함이며 열등함이라는 불안과 강박을 뒤집은 것이기도 하다. 지식에 대한 과도한 욕망과 집착은 한 톨이라도 더 알아야 외면당하지 않고 관심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생존의 전략’과 무관하지도 않다. 문제는 지적 허영이 강할수록 자신의 무지에 대해 깨닫는 길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지점에 이르면 이미 낡아서 누더기가 된 지적 허영의 외투를 입고 독단과 위선의 외침을 되풀이한다. 물론 그럴수록 더 남루하게 되지만.
무지에 대한 성찰을 철학의 중요한 본질로 본 철학자가 소크라테스다. 그에 따르면 세상의 근원적 무지는 자신의 무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다. 그래서 그는 “나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라고 역설한다. 이 말의 실천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난해한 관념적 언어 대신 거리의 대화를 통한 ‘철학하기’로 일생을 보냈다.
말 잘하는 기술이 지적 허영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될 때, 그 대가는 비싸다. 도구적 지식은 지혜가 아닌 독단과 위선의 무기가 되고, 앎은 삶과 모순되고 분리되는 결과를 낳는다. 소위 전문가라거나 지식인들에게서 혐오스러울 만큼 자주 보는 모습이다. 자신의 탁월한 식견과 판단을 마치 고장 난 세상을 위한 최고의 처방이라는 태도로 선심 쓰듯이 던져 준다. 날카로운 논리와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어느 지식인은 대중의 무지몽매함을 안타까워하며 최근에는 강연 도중에 눈물 바람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 양심과 사명감으로 뭉친 지식인의 절대적이고 전지적 자세에 그저 입이 다물어진다.
지식의 유통 기간은 갈수록 짧아지고, 세상은 언제나 반짝이며 나타나는 새로운 것을 환호하는 법이다. 현실이 이러하니 늘 앞서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 또한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하물며 우월적 지식과 전지적 태도로 존재가치가 좌우되는 전문가와 지식인 노릇은 보통 힘든 일은 아니다. 다만 이 모든 현상은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전문가 사회를 강요하게 되며, 종속을 주체적 선택으로 착각하게 한다는 것이 문제다. 이런 삶을, 비판적 사상가인 이반 일리치는 식민지적 삶이며 지식의 상품화라고 경고한다.
다시 말하면 전문가의 상품화된 지식은 진열대 위의 상품과 비슷하다. 계속 새로운 지식을 내놓지 못하면 진열대 위에서 버틸 수 없다. 진열대 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말 잘하는 기술, 무슨 무슨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악다구니를 쓰거나, 지식의 ‘세일’을 해야 한다. 이 구조의 작동 원리에는 한 줌도 안 되는 지적 허영과 우월감으로 기꺼이 지식 식민지의 공범자 대열에 합류하는 수많은 ‘우리’가 자리한다.
지적 허영은 종속을 강요하는 지식의 힘을 좇고, 무지의 성찰은 종속을 거부하는 지혜의 길을 향한다. 죽음의 무게마저 망자가 남긴 것에 따라서 달리하는 세상이다. 모든 것이 갈수록 더 거칠어지고 독해지며 언어는 가시처럼 사나워진다. 하지만 흔히 빈틈없는 논리라고 말하는 것조차 종종 자신의 무지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 이때 우리의 무지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무지에 대한 용기 있는 고백이거나, 모르는 것에 대한 정직한 침묵이다.
지식의 유통 기간은 갈수록 짧아지고, 세상은 언제나 반짝이며 나타나는 새로운 것을 환호하는 법이다. 현실이 이러하니 늘 앞서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 또한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하물며 우월적 지식과 전지적 태도로 존재가치가 좌우되는 전문가와 지식인 노릇은 보통 힘든 일은 아니다. 다만 이 모든 현상은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전문가 사회를 강요하게 되며, 종속을 주체적 선택으로 착각하게 한다는 것이 문제다. 이런 삶을, 비판적 사상가인 이반 일리치는 식민지적 삶이며 지식의 상품화라고 경고한다.
다시 말하면 전문가의 상품화된 지식은 진열대 위의 상품과 비슷하다. 계속 새로운 지식을 내놓지 못하면 진열대 위에서 버틸 수 없다. 진열대 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말 잘하는 기술, 무슨 무슨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악다구니를 쓰거나, 지식의 ‘세일’을 해야 한다. 이 구조의 작동 원리에는 한 줌도 안 되는 지적 허영과 우월감으로 기꺼이 지식 식민지의 공범자 대열에 합류하는 수많은 ‘우리’가 자리한다.
지적 허영은 종속을 강요하는 지식의 힘을 좇고, 무지의 성찰은 종속을 거부하는 지혜의 길을 향한다. 죽음의 무게마저 망자가 남긴 것에 따라서 달리하는 세상이다. 모든 것이 갈수록 더 거칠어지고 독해지며 언어는 가시처럼 사나워진다. 하지만 흔히 빈틈없는 논리라고 말하는 것조차 종종 자신의 무지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 이때 우리의 무지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무지에 대한 용기 있는 고백이거나, 모르는 것에 대한 정직한 침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