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유(通儒) 고봉 기대승 선생
2019년 11월 04일(월) 04:50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우석대 석좌교수]

음력 9월 초정(初丁)은 바로 월봉서원(月峯書院) 추향(秋享)의 날이었다. 월봉서원은 조선왕조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퇴계·율곡과 같은 수준의 성리학자 중 한 분인 고봉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사당이 있어, 많은 선비들이 모여 선생의 학덕(學德)을 기리는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고봉은 바로 호남의 가장 큰 고을인 광주의 상징적인 학자이다. 서원으로부터 제관(祭官)의 망첩을 받고 평생에 숭모하던 고봉 선생의 신위(神位)에 술잔을 올리며 찾았던 그날은 마침 초가을의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월봉서원은 광주시 광산구 광곡길에 위치한 서원인데,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전통을 지닌 곳이다. 고봉이 1572년 46세라는 참으로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아끼고 사랑하며 또 그의 높고 깊은 학문을 한없이 우러르던 동료나 후학들의 정성으로, 6년 뒤인 1578년에 서원이 세워졌다. 지금으로부터 440년 전의 일이다. 나라에서 서원 철폐령을 내렸던 1868년 훼철을 당했으나, 유림 등의 정성으로 1938년 서원이 다시 복설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와 시설 확충을 통해 면모를 완전히 갖추어, 이제는 국내 굴지의 서원으로 덩실하게 서 있다.

고봉은 애초에는 전라도 성리학자들로 선배 되는 일재 이항, 하서 김인후 등과 학문을 토론하고 질문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러나 벼슬하던 시기에 영남의 퇴계 이황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닦았다. 더구나 퇴계와 고봉은 8년에 걸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길고 긴 토론과 질의를 겸한 서간을 주고받아, 세상에서 유명한 ‘퇴계고봉왕복서’(退溪高峯往復書)를 탄생시켰다. 세계적으로 흔한 일이 아닌 퇴고왕복서, 학술사에서 찾기 힘든 학술 논쟁을 역사에 남겨 준 위대한 학자가 바로 고봉이었다.

때는 1569년 선조 2년 3월 4일이었다. 조선을 대표하던 학자 이황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기 직전, 선조 임금을 야대청(夜對廳)에서 뵈었다. 선조는 퇴계에게 물었다. “학문하는 사람 중에 나에게 알려 주고 싶은 학자는 없는가? 기탄없이 말해 주오.” 그러자 퇴계는 그 일(나라를 위해서 학자를 추천하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없다고 했다. 송나라의 정자(程子) 같은 현인도 그렇게 우수한 제자들을 많이 거느렸으면서도 추천할 사람을 고르기 어렵다고 했다면서, 자신도 추천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퇴계는 말했다. “그러나 기대승의 사람됨은 옛 글을 많이 보았고 성리학에 있어서도 소견이 가장 뛰어나니, 그는 바로 ‘통유’(通儒:학문에 통달한 유학자)입니다.(其中奇大升之爲人 多見文字 於理學所見 最爲超詣 乃通儒也)”라고 답했다고 한다. 바로 고봉과 선조와의 대화를 기록한 ‘논사록’(論思錄)이라는 책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퇴계는 또 고봉의 부족한 점도 빠뜨리지 않았다. 고봉에게는 ‘수렴지공’(收斂之工) 즉 밖으로 발표하는 공부보다는 안으로 숨기고 감추는 학문의 공부가 약간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그때 고봉의 나이는 겨우 43세, 외향적인 것에 비교하여 내향적인 측면이 부족하다는 뜻이었으니, 성격 탓도 있겠지만 연령 탓도 있었으리라. 그런 뛰어난 학자가 겨우 퇴계가 돌아가신 후 3년 만에 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호남 학계의 불운이자 조선 학계의 불행이었다. 고봉은 3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검상(檢詳)·사인(舍人)등 찬란한 벼슬을 거쳤고, 부제학·예문관직제학·성균관 대사성·대사간·공조 참의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그는 언관(言官)의 직책에 있으며 곧은 말 잘하기로 세상에서 유명했으니, 조광조·이언적 등 억울하게 사화(士禍)를 당한 옛 어진 이들을 복권하고 증직하자는 주장을 펴서 모두 실현시키기도 하였다.

고봉은 벼슬살이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으나, 역시 그는 학자였다. 퇴계와의 학문 논쟁으로 조선 성리학의 새로운 틀을 짜 낼 수 있었고, 후배인 율곡에게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성리 이론을 주장한 점도 크게 주목받을 일이었다. 그는 저서 ‘고봉집’(高峯集)과 ‘논사록’(論思錄)등 학문 수준도 뛰어났지만, 순수 성리학자들과 다르게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예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등 실용학인 경세론(經世論)에도 밝았다. 그 때문에 뒷날 기호학문이 이론에만 치우친 영남학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계기를 열기도 했었다. 모든 분야에 통달했던 대유 고봉 기대승, 우리 호남의 자랑스러운 학자요 조선의 성리학자였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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