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여태 흩뿌려지는 빛-은희경 ‘빛의 과거’
2019년 10월 10일(목) 04:50 가가
여태 흩뿌려지는 빛 - 은희경 ‘빛의 과거’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니얼 퍼거슨의 대표적 저서 ‘증오의 세기’는 20세기를 지배한 두 전쟁(1·2차 세계대전)을 심도 있게 다룬다. 그가 전쟁의 참상을 설명하는 방법은 논문, 통계, 사진 자료 같은 것이 아니다.
2차세계대전에 비해 남겨진 자료가 취약한 1차 세계대전에서의 니얼 퍼거슨이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데 쓴 주요한 자료는 놀랍게도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이다. 그는 소설 속 인물들 사이의 대화, 소설에서 묘사된 전쟁터의 상황 등을 토대로 증오로 얼룩진 100년의 성급한 시작으로서의 1차 세계대전을 논의한다.
소설은 시대의 거울이 된다는 철 지난 비유를 들먹거리려는 건 아니다. 차라리 그 말이 비유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어떤 소설은 시대의 거울이 아닌, 시대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소설 속 인물들의 갈등과 선택, 그 인물을 둘러싼 배경은 한 시대를 기억하는 사료가 된다. 1977년 여자대학교의 기숙사를 배경으로 한 은희경의 신작 장편소설, ‘빛의 과거’가 바로 그렇다. 1977년은 군사독재의 서슬이 긴급조치라는 이름으로 발동되던 때다. 학교 축제에서 고등학생들은 선생의 구령과 협박에 맞춰 카드섹션을 연습하고 대학에는 학도호국단이 존재하던 시대다.
역사적 사실과 그에 따른 논평 몇 줄로 끝날 기억을 다시 들추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시대 그 자체로 존재하길 원하는 소설은 시대가 시대이길 원하는 방식의 반대로 몸을 움직인다. ‘빛의 과거’는 진실을 확정시키지 않고 각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믿고 말하는 인물들을 병렬시켜 진실을 흔든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시대를 읽어 내는 것을 넘어, 그 시간을 의심하게 된다. 그 의심은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의 시간까지도 이어진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김희진으로 사는가, 송선미로 사는가, 혹은 소설의 인물 몇을 섞어 놓은 것처럼 사는가. 그 삶의 조각조각이 결국 시대를 이루는 살과 피는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은 매우 합리적이다.
소설은 1970년대 말의 세피아빛 공기를 눅눅하게 내리깔면서도 인물 각자가 가진 고유한 매력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사정과 취향과 동선에 따라 나타나는 당시의 풍속은 세밀하기 그지없다. 순진무구하지도, 선하지도, 악랄하지도 않은 인물들은 그에 따라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는다. 시대는 그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나아간다.
소설에서의 종착지는 2017년이지만,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2019년이다. 그만큼의 시간을 소설을 통해 깊게 닿았다가 어렵게 떨어진다. 그 시절의 뉴스 한 줄, 영상 한 컷이 담을 수 없는 사람을 다뤄 그것을 시대의 구성원으로 편입시킨다. 뉴스의 주변부, 영상의 바깥에 서 있던 여성에게 ‘빛의 과거’는 일정한 몫을 준다. 과거의 빛을 길게 늘어뜨려, 지금에 와 비춘다.
빛은 빛으로 존재하는 일이 없다. 빛은 굴절되고 반사되며 그 나름의 형태를 갖춰 우리 눈에 들어온다. 빛을 빛으로 보기 위해 눈을 치켜뜨면 안구의 건강이 해로워질 뿐이다. 그러니까 소설은 빛을 끌어모아 여기저기에 흩뿌리는 것이다. 따지자니 소설은 시대의 거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을 치장하는 일은 위험하다. 그 거울은 아마도 당장의 아름다움이 아닌 그 안의 감춰진 것들을 까발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는 기억이 그렇다. 기억은 진실을 담보하는가. 기억을 끝내 손에 쥐고 가늠하려는 인물이 지금에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1977년의 여자대학교 기숙사는 2019년의 광장과 밀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소설은 끄트머리에 이르러 타인의 문장을 인용하는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진실이 어디 있어. 각자의 기억은 그 사람의 사적인 문학이란 말 못 들어봤니?”
“오래전의 유성우로 지금 존재하는 커다란 호수를 설명할 수 있다.”
소설은 시대의 거울이 된다는 철 지난 비유를 들먹거리려는 건 아니다. 차라리 그 말이 비유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어떤 소설은 시대의 거울이 아닌, 시대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시대를 읽어 내는 것을 넘어, 그 시간을 의심하게 된다. 그 의심은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의 시간까지도 이어진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김희진으로 사는가, 송선미로 사는가, 혹은 소설의 인물 몇을 섞어 놓은 것처럼 사는가. 그 삶의 조각조각이 결국 시대를 이루는 살과 피는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은 매우 합리적이다.
소설은 1970년대 말의 세피아빛 공기를 눅눅하게 내리깔면서도 인물 각자가 가진 고유한 매력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사정과 취향과 동선에 따라 나타나는 당시의 풍속은 세밀하기 그지없다. 순진무구하지도, 선하지도, 악랄하지도 않은 인물들은 그에 따라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는다. 시대는 그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나아간다.
소설에서의 종착지는 2017년이지만,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2019년이다. 그만큼의 시간을 소설을 통해 깊게 닿았다가 어렵게 떨어진다. 그 시절의 뉴스 한 줄, 영상 한 컷이 담을 수 없는 사람을 다뤄 그것을 시대의 구성원으로 편입시킨다. 뉴스의 주변부, 영상의 바깥에 서 있던 여성에게 ‘빛의 과거’는 일정한 몫을 준다. 과거의 빛을 길게 늘어뜨려, 지금에 와 비춘다.
빛은 빛으로 존재하는 일이 없다. 빛은 굴절되고 반사되며 그 나름의 형태를 갖춰 우리 눈에 들어온다. 빛을 빛으로 보기 위해 눈을 치켜뜨면 안구의 건강이 해로워질 뿐이다. 그러니까 소설은 빛을 끌어모아 여기저기에 흩뿌리는 것이다. 따지자니 소설은 시대의 거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을 치장하는 일은 위험하다. 그 거울은 아마도 당장의 아름다움이 아닌 그 안의 감춰진 것들을 까발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는 기억이 그렇다. 기억은 진실을 담보하는가. 기억을 끝내 손에 쥐고 가늠하려는 인물이 지금에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1977년의 여자대학교 기숙사는 2019년의 광장과 밀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소설은 끄트머리에 이르러 타인의 문장을 인용하는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진실이 어디 있어. 각자의 기억은 그 사람의 사적인 문학이란 말 못 들어봤니?”
“오래전의 유성우로 지금 존재하는 커다란 호수를 설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