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시영, 후주의 2대 황제, 오대 최대 명군
2019년 07월 09일(화) 04:50 가가
시영(柴榮, 921~959)은 오대 시대 후주의 2대 황제로 오대 최대의 명군으로 평가된다. 시영은 호북성 형주 출신으로 부친은 시수례다. 작은 고모가 후주를 창건한 곽위와 결혼함으로써 곽위는 고모부가 되었다. 자식이 없던 곽위 부부는 시영을 양자로 삼았다. 어릴 때부터 고모집에서 자랐는데 고전, 역사 및 황로사상을 전수받았다. 후한의 고조 유지원이 948년 사망하고 둘째 아들 유승우가 승계하니 은제다. 호국절도사 이수정이 반란을 일으키자 추밀사 곽위가 이를 평정했다. 은제는 오히려 곽위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군대를 일으켜 수도 개봉으로 진군했다. 956년 개봉에 입성하자 고조 유지원의 조카인 무녕절도사 유변을 황제로 밀었다. 그러나 요나라가 남하하는 등 상황이 급변하자 황제로 옹립되니 후주의 태조다. 태조는 시영에게 단주를 통치토록 하였다. 이어 진왕으로 봉하고 시중 판내외병마사를 겸임하게 했다. 진왕이 병권을 장악하면서 조정 안팎과 민심이 점차 안정되었다. 954년 태조가 3년만에 병사하자 2대 황제 세종으로 즉위했다.
태조가 사망하자 북한의 유숭이 후주를 멸하기 위해 요의 원군을 빌어 3만의 병력으로 침공하였다. “유숭은 우리의 국상을 다행으로 여기고 짐이 어리고 새로이 즉위한 것을 가벼이 여겨 천하를 삼킬 마음이 생겼다. 반드시 친히 올 것이다. 짐이 가지 않을 수 없다”며 직접 친정에 나섰다. 고평 전투에서 조광윤의 분전에 힘입어 북한군을 대파했다.
처음에는 북한군의 공격에 밀렸으나 형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시체가 산과 들에 가득했고, 많은 군대의 짐과 무기, 말 등이 길에 버려졌다. 싸움터를 이탈한 장군 번애능 등 70여명을 체포해 참수하여 기강을 바로 잡았다. 전투에 동원된 군사들이 대부분 늙고 병약했다. 군대 개혁에 나서 정예한 자는 상군으로 올리고 병약한 자는 내쫓았다. 용맹한 자를 선발해 조광윤을 책임자로 하는 전전제반(殿前諸班)을 만들었다. 이후 후주의 군대는 날쌔고 용맹해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다. 또한 강력한 절도사의 횡포를 억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세종은 세금감면, 토지개간, 치수에 노력을 기울였다. 관료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고 예산 낭비를 억제했다. 955년에는 억불(抑佛) 정책을 펴 백성이 무분별하게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많은 사찰을 폐지하였다. 불상?동기 등은 몰수해 동전을 주조했으며 사찰 토지를 환수 조치하였다. 이로써 과세기반을 넓히고 전투에 동원할 젊은 장정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세종은 고평 전투 이후 천하를 평정할 뜻을 세웠다. 군신들에게 명해 임금과 신하 노릇하기가 쉽지 않음을 논하는 글 위군난위신불이론(爲君難爲臣不易論)과 변방을 개척하는 책략 개변책(開邊策)을 지어 바치도록 하였다. 비주낭중 왕박이 책문을 올렸다. “무릇 공격해 빼앗는 방법은 반드시 쉬운 곳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실을 피하고 허를 공격하고,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합니다. 강북을 얻고 나면 강남 또한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하동만은 은혜와 신의로 회유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강한 병사로 그들을 제어해야 합니다.” 공취(攻取)의 길은 반드시 쉬운 곳부터 우선한다는 원칙에 따라 통일 대업에 나섰다. 우선 후촉을 공격해 감숙성 천수현과 섬서성 봉현을 확보했다. 다음으로 남당을 공격해 강북 땅을 취했다. 955년 거란을 공격해 하북성 익진관과 외교관을 취하고 후진이 거란에 할양한 연운 16주 가운데 막주와 영주를 얻었다. 그러나 유주를 취하기 전에 병을 얻어 959년 6월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군을 다스릴 때는 군령이 엄해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했다. 부지런히 정사에 임했고 한가하면 학자를 불러 전대의 역사를 상고하였다. 신하가 과오가 있으면 면전에서 책망하였으나 반성하면 용서하였다. 공은 후하게 포상했다. 문무를 섞어서 등용했다. 그러나 법을 너무 엄격히 집행했고 재능 있는 자라도 관대함을 베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임종하자 많은 백성들이 크게 슬퍼하고 그리워했다고 한다.
세종은 고평 전투 이후 천하를 평정할 뜻을 세웠다. 군신들에게 명해 임금과 신하 노릇하기가 쉽지 않음을 논하는 글 위군난위신불이론(爲君難爲臣不易論)과 변방을 개척하는 책략 개변책(開邊策)을 지어 바치도록 하였다. 비주낭중 왕박이 책문을 올렸다. “무릇 공격해 빼앗는 방법은 반드시 쉬운 곳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실을 피하고 허를 공격하고,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합니다. 강북을 얻고 나면 강남 또한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하동만은 은혜와 신의로 회유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강한 병사로 그들을 제어해야 합니다.” 공취(攻取)의 길은 반드시 쉬운 곳부터 우선한다는 원칙에 따라 통일 대업에 나섰다. 우선 후촉을 공격해 감숙성 천수현과 섬서성 봉현을 확보했다. 다음으로 남당을 공격해 강북 땅을 취했다. 955년 거란을 공격해 하북성 익진관과 외교관을 취하고 후진이 거란에 할양한 연운 16주 가운데 막주와 영주를 얻었다. 그러나 유주를 취하기 전에 병을 얻어 959년 6월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군을 다스릴 때는 군령이 엄해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했다. 부지런히 정사에 임했고 한가하면 학자를 불러 전대의 역사를 상고하였다. 신하가 과오가 있으면 면전에서 책망하였으나 반성하면 용서하였다. 공은 후하게 포상했다. 문무를 섞어서 등용했다. 그러나 법을 너무 엄격히 집행했고 재능 있는 자라도 관대함을 베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임종하자 많은 백성들이 크게 슬퍼하고 그리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