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놓치는 사람
2019년 06월 28일(금) 04:50

[황성호 영암 신북성당 주임신부]

2010년부터 2016년까지 남미 칠레에서 선교 사제로 살았던 영향인지, 나는 가끔 대화 중에 스페인어를 사용할 때가 있다. 어떤 표현들은 한국어보다는 스페인어가 더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지 3년이 지났지만, 몇몇 스페인어 숙어를 기억하고 있기에 몇 마디 적어본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지역 사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가는 길이 좀 멀어 기사와 몇 마디 나눈다는 것이 칠레 정치까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때 기사가 정치인들을 빗대어 말한 문장이 기억난다. 그는 정치인들을 ‘추파 라 상그레’(Chupa la Sangre)라고 하였다. ‘빨다’라는 추파르(Chupar) 동사와 ‘혈액, 피’를 의미하는 상그레(Sangre)라는 단어를 합친 것이다. 이 문장은 스페인어 문화권에서 오랜 동안 사용되어 왔던 문장인데 특히 정치인들에게 쓰였다. 직역을 해보면 ‘그는 피를 빨아먹는다’라는 의미다. 의역을 해보면 ‘남의 재산을 빨아먹다’ 또는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다’라는 의미로 번역된다.

이 문장을 기억하면서, 우리나라 국회의원을 생각해본다. 이들의 권한은 그들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 선택에 의해서 당선되었고 국민으로부터 특별 권한까지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말과 행동이 국민에게 고통을 주고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면, ‘Chupa la Sangre’라는 말처럼 적절한 문장은 없을 것이다.

칠레의 빈민가에서 활동했던 나는, 신자들로부터 밤늦게 거리를 다니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왜냐하면 빈민가는 경찰까지도 꺼리는데 범죄와 마약이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함께 선교했던 사제들이 가끔 주머니를 털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거리의 좀도둑들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정도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덮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숙어가 기억난다. 가또 엔세라도(Gato Encerrado), 가또(Gato)는 ‘고양이’를 의미하고, 엔세라도(Encerrado)는 엔세라르(Encerrar)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두다’ ‘감추다, 숨기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Gato Encerrado를 직역해보면 ‘감추는 고양이’로, 의역하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숨은 고양이’로 번역할 수 있다. 곧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꼼수를 부리거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꿍꿍이수작’이라고 사용된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경쟁 상대로서 내가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는지? 나의 삶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나’를 대하듯 다른 사람을 대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서로를 북돋아 주는 나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존재로 생각하는지? 꿍꿍이수작(Gato Encerrado)이라는 말은 입으로는 공동체의 조화와 일치를 말하지만 속에서는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탐욕을 감추고, 겉으로는 화해와 용서를 말하지만 속에서는 언제든 기회만 되면 상대의 뒤통수를 쳐서 이기려 하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안에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자기 합리와 자기 논리로 절대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아직 필자는 공부가 부족한 것 같아, 지금 야간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을 만나 직접 대화하고 토론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한 기회이다. 어느 날 수업 중에 만학의 길을 걷는 분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였다. “교회가 참 좋다. 어릴 때는 교회에서 연필도 주고 연습장도 주고…. 그런데 나는 신앙이 없는데 왜 그렇게 예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하느님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고, 예수는 당신의 삶에서 단 한 번도 사람을 놓치지 않으셨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하는 내 자신도 진실하게 들여다보았다. 사람을 놓치는 사람! 곧 사람을 밀쳐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인지? ‘추파 라 상그레’(Chupa la Sangre)나 ‘가또 엔세라도’(Gato Encerrado)는 아닌지.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