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 시대, 문화관광을 키우자] <2> 예술의 섬 제주
예술을 품은 제주… 제주를 담은 예술
‘삼다의 섬’ 옛말… 미술관·서점·공연장 등 급증
문화공간·사적지 연계 ‘아트 관광’ 효과 톡톡
2019년 04월 15일(월) 00:00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의 옛 통신벙커에서 열리고 있는 미디어아트전 ‘빛의 벙커: 클림트’. 개막 5개월 동안 전국 각지에서 미술애호가들을 끌어 들이는 등 제주관광에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높다란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깊은 탄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하다. 가로 100m, 세로 50m의 직사각형으로 구획된 어둠은 순간 관람객의 오감을 마비시킨다. 아마 음악이 없었다면 공포감을 느낄 법하다. 이윽고 어디선가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이 묵직하게 흘러나온다. 그 순간, 사방의 벽과 바닥이 고풍스러운 벽화와 장식으로 물들여지기 시작한다. 마치 해변에 밀물이 들어오는 것 처럼 마음이 설렌다.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클림트의 ‘황금 시기’ 작품들이다. ‘키스’ ‘유디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등 클림트의 대표작들이 차례 차례 금빛으로 퍼지자 여기 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고화질 빔 프로젝터 90대가 사방 벽에 빛을 쏘고 70여대의 스피커는 말러,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을 전시장 곳곳에 퍼뜨린다. 관람객들의 환호를 자아내는 대목은 바로 이때부터다. 노랗게 반짝이는 전시장 바닥 위를 느릿느릿 걷다 보면 꿈길을 걷는 듯 황홀하기 때문이다.

이달 초 둘러본 제주도는 때아닌 유채(油彩) 관광객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봄의 전령사인 유채(油菜)꽃을 찾는 상춘객 못지 않게 색다른 미술체험을 만끽하려는 이들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문화 나들이를 온 듯 느긋하다. 그림과 음악에 취한 일부 관람객은 묘한 감정에 취해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특히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초상’이 벽면에서 관능의 흰 얼굴로 솟아나올 땐 관람객의 표정에서도 희열이 느껴진다.

진원지는 바로 미디어아트전 ‘빛의 벙커: 클림트’(오는 10월 27일까지 전시). 지난해 11월 16일부터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의 옛 통신벙커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는 25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빛의 벙커’는 명화, 미디어 아트, 음악의 조화가 빚어낸 예술의 향연이다. 프랑스 회사 컬처스페이스가 개발한 미디어아트 기술에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훈데르트바서의 그림을 음악과 함께 영상화한 뒤 전시장 삼면(三面)에 투사하는 입체 전시다. 100여 대의 프로젝터가 쏜 빛이 넓이 3000㎡, 높이 6m 규모 벙커의 암흑을 한순간 판타지 세계로 바꿔 놓는다.

이처럼 ‘빛의 벙커’는 불과 개막 5개월 만에 제주의 문화예술 랜드마크로 떠오르며 관광지형도를 바꾸어 놓고 있다. 프랑스 레보드프로방스의 ‘빛의 채석장(Carrieres de Lumieres)’, 파리 ‘빛의 아틀리에’에서만 볼 수 있었던 전시를 둘러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 들고 있는 것이다. 이 전시 프로젝트를 계기로 제주도는 평범한 관광명소에서 색다른 감동을 선사하는 예술의 섬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제 제주가 ‘바람, 돌, 여자가 많은’ 삼다( 三多)의 섬이란 말은 옛말이 됐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제주시와 서귀포 곳곳에 미술관들이 급격히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 한달 살기’가 인기를 끌면서 작가들의 ‘제주도행’이 늘어난 데다 문화관광수요가 확산되면서 미술관, 서점, 공연장 등 문화공간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유민미술관은 근래 관광객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대표적인 공간이다. ‘빛의 벙커’처럼 이 곳 역시 지하로 파고 들어간, 제주를 품은 미술관이다. 섭지코지의 제주 휘닉스파크에 둥지를 튼 유민미술관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2008년 국내에 선보인 명상센터 ‘지니어스로사이’를 미술관으로 오픈한 것으로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미술관 전시 설계는 덴마크 건축가인 요한 칼슨이 맡았다.

미술관 정문에 들어서면 한라산 백록담을 연상키는 연못이 반긴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미술관 입구까지 걸어가다 보면 제주의 지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대가 점점 낮아지면서 산간, 중산간, 해안으로 이어지는 변화를 반영한 건축 콘셉트 때문이다. 제주의 돌과 바람을 만끽할 수 있도록 꾸며진 정원을 지나면 성산일출봉이 기다란 사각틀 안으로 들어오는 ‘뷰파인더’ 창문이 나타난다. 미술관 방문객이라면 누구나 발걸음을 멈추고 인증샷을 찍는 포토존이다.

미술관의 컬렉션은 아루누보 양식의 유리공예품이다. 프랑스 낭시 지역의 유리공예가 작품들로 마치 컬렉션에 맞춰 미술관을 설계한 듯 작품 하나 하나가 공간을 압도한다. 가장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에밀 갈레이 ‘버섯 램프’는 천장과 벽을 검은색으로 칠한 원통형 ‘명작의 방’에서 외롭게 불을 밝히며 관람객을 기다린다. 이밖에 제주도 자연과 지형적 특징을 콘셉트로 한 야외 정원을 비롯해 ‘영감의 방’ ‘아르누보 전성기의 방’ ‘램프의 방’ 등 4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으며 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샤이닝 글라스’가 인상적이다.

유민미술관의 ‘명작의 방’에 전시된 에밀 갈레의 ‘버섯램프’(Les Coprins). 인간의 청춘, 장년, 노년을 자연의 변화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다.
서귀포시는 유민미술관 개관 이후 인근의 미술관과 건축물을 관광코스로 연계한 ‘서귀포건축문화기행’ 관광상품을 운영중이다. 현재 발굴된 코스는 10개 테마, 44개 스팟(spot). 1코스는 전쟁과 근대건축을 테마로 한 남제주비행기격납고, 구 대정면사무소, 강병대 교회, 제주 구 해병훈련시설, 2코스는 추사따라 가는 길을 테마로 대정성지, 추사기념관, 대정향교 등이다. 코스별로 역사와 문화, 세계적인 예술가의 작품을 내걸고 매년 국내외 파워블러거,언론인, 건축문화재 관계자, 일반시민 등을 대상으로 팸투어를 실시하고 있다.

미술관 ·건축기행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팟은 이중섭 미술관과 인근의 ‘작가의 산책로’이다. 한국전쟁 직후 내려와 1년간 피난생활을 했던 ‘인연’을 부각시켜 초가를 복원해 기념관으로 개방한데 이어 지난 2002년 바로 옆에 미술관을 열어 ‘제주특별자치도립 이중섭 미술관’으로 명명했다. 또한 전국 최초로 예술인의 이름을 딴 ‘이중섭 거리’를 재정해 예술인들의 아지트로 가꾸고 있으며 도보로 10분 거리인 자구리 해안에 이중섭 공원을 조성해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 화백이 아이들과 자주 게를 잡는 등 행복한 시간을 보낸 자구리 해안에는 이중섭미술관~ 커뮤니티센터~기당미술관~칠십리시공원~솔동산 문화의 거리(이중섭 산책로)~이중섭 공원~소암기념관 등 3개의 코스로 꾸민 ‘작가의 산책로’를 만날 수 있다. 이밖에 제주지는 올레 코스에 4·3 유적지, 추사적거지및 기념관, 제주현대미술관, 저지문화예술인 마을, 김창열 미술관 등 문화공간과 사적지 등을 연계한 아트올레와 축제를 개최해 아트관광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제주=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 기자 jhpark@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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