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5·18 ⑩ 옛 도청 진압작전<상>
범죄없는 ‘해방 광주’…당황한 신군부 ‘도청 유혈작전’ 준비
전두환 등 참석 작전회의 ‘27일 0시 1분’ D데이 H아워 확정
시민군 중재요구 거절…계엄군에 소 7마리 먹이고 작전 개시
2018년 08월 01일(수) 00:00

1980년 5월22일 계엄군 퇴각 후 옛 전남도청을 장악한 시민군들이 창문 밖으로 계엄군 퇴각을 확인하러 나온 시민들을 바라보고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1980년 5월 21일 옛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계엄군이 외곽으로 철수하자 시민들은 ‘해방 광주’를 맞았다.

‘치안부재’ 상황에서도 광주시민들은 자율적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담배도 1인당 한갑씩 사고파는 등 파는 쪽이나 사는 쪽이나 사재기를 자제했고 부상자들 때문에 피가 모자라는 병원 앞에는 학생부터 노인까지 헌혈하려는 시민들이 줄을 섰다.

당시 광주 시내에는 42개 은행이 있었고 총 예치금은 1500여억원에 달했지만 약탈이나 절도는 발생하지 않았다. 일부 시민들은 이 기간이 평상시보다 치안 상태가 더 좋았다고 회고한다. 사소한 범죄가 발생하면 ‘시민군 기동순찰대’가 즉각 출동해 상황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해방 광주 때 보여준 시민정신은 오늘날 광주가 세계적인 민주·인권·평화도시로 성장하는 데 뿌리가 됐다.

반대로 정권을 찬탈하려는 신군부에게 광주는 넘어야할 산이었다. 만약 이 기간에 광주에서 일말의 폭동이나 강력범죄가 발생했다면 신군부는 5·18 강경 진압에 대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지만 광주시민들은 그 빌미를 주지 않았다. 신군부의 1980년 5월27일 옛 전남도청 진압작전이 지탄받는 이유다.

5월21일 계엄군의 옛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로 사망한 시위대의 시신이 든 관을 보기 위해 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상무충정작전 수립=광주 상황이 평화롭게 유지될 무렵 신군부는 광주를 재점령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2007)에 따르면 1980년 5월23일 오후 3시 2군사령부 작전처장 김준봉 준장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최종 진압작전인 충정작전 계획을 건의했다.

이희성 사령관은 “한·미간 협의. 5월24일까지 진압작전 연기, 무력으로 평정은 지역감정 해소 곤란, 민간인을 인질로 했을 시 대처 곤란” 등을 이유로 연기했다. 주영복 국방부장관도 5월25일 새벽 2시까지 진압작전을 연기하도록 지시했다. 광주에서 일부 시위대만 진압하면 될 줄 알았던 군 수뇌부는 당초 24일을 진압 시점으로 잡았지만 광주시민들이 스스로 무기를 반납하고 있었고 미군측과의 협의가 늦어지면서 연기된 것이다.

김재명 육군 작전참모부장이 24일 오후 4시 미국과의 협의를 끝내자 제2군사령부는 5월25일 낮 12시5분 ‘작상전 517호(충정작전 유효 지시)’를 내리며 전교사령관 지휘 아래 5월27일 새벽 1시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상무충정작전’을 보류하도록 요청했던 군 장성도 있었다. 5월23일 오전 9시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열렸던 ‘전남지역 폭도소탕계획’ 대책 회의에서 당시 육군본부 군수참모부 박춘식 보급운영처장은 폭도와 시민들을 분리시킨 뒤 공격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박 처장은 이 사령관에게 “공격 24시간 전에 내가 광주로 들어가 시민들에게 투항하도록 설득하겠다. 나 하나 죽어 유혈사태 없이 평온을 찾는다면 그 이상의 영광이 없겠다”고 말했다.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25일 오후 6시 최규하 전 대통령이 광주에 내려와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했다. 이날 소준열 전교사령관은 “군의 개입 없이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장형태 전남도지사는 “군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좀더 여유를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같은날 진압작전은 최종 결정된 상황이었다. 이날 낮 12시15분 육군회관에서는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황영시 계엄사령부 참모차장,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이 모여 작전 개시 시각을 ‘27일 새벽 0시1분 이후’로 확정했다. 이를 토대로 세워진 ‘육군본부 작전지침(상무충정작전)’이 5월 26일 전교사령관과 제2군사령관에게 하달됐다.

◇공수여단 특공조, 은밀히 침투 준비=광주에 투입된 3·7·11공수여단은 5월24일 20사단과 교대한 뒤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 도청 진압작전 투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투입명령이 떨어졌고 예행연습에 들어갔다.

3공수여단 11대대 소속 지역대장이었던 신순용(70)씨는 “특공조를 편성한 뒤 송정리 비행장 격납고 안에 도청 모형과 지형지물 등을 만들어놓고 침투 경로와 퇴로 등을 미리 파악하고 훈련했다”고 설명했다.

도청 진압 작전에서 가장 걸림돌은 도청 지하실에 있던 폭약이었다. 당시 시민군은 화순탄광과 각 경찰서 무기고 등에서 가져온 TNT 10여상자, 폭약 2500여상자, 수류탄 270여발을 보관하고 있었다. 진압 중 자칫 폭약이 터질 경우 공수부대, 시민군 뿐 아니라 도청 인근 민간인 피해가 불보듯 뻔했다.

시민군 폭약관리반으로 활동했던 문용동(당시 27세)씨는 이를 우려하고 5월24일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을 만나 폭약 해체를 논의했다. 전교사는 폭약전문 군무원 배승일씨를 시민군으로 위장해 투입시켜 TNT를 비롯한 폭약물을 해체했다. 이 일로 문씨 등은 계엄군의 첩자였다는 오명을 쓰게 됐고 3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첩자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도청 진압작전을 하루 앞둔 5월26일에는 송정리 비행장과 전교사에 대기중인 사병들에게 총 6300만원의 금액과 중식용 소 7마리가 내려졌다.

◇시민군 죽음의 항거 결의=27일 도청 진압작전이 감행된다는 사실은 시민군도 미리 알고 있었다. 하루 앞선 26일 새벽 4시 광주외곽을 봉쇄하고 있던 계엄군은 서구 농성동 통합병원, 현 백운로터리, 무등경기장 등 3개 방면에서 도심쪽으로 포위망을 좁혔다. 도로를 확보하려는 계획이었다.

홍남순 변호사, 김성용 신부 등 시민수습위원들은 전교사에서 김기석 부사령관을 만나 항의했고 김 부사령관으로부터 “밤 12시까지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도청소탕 작전에 들어간다”는 최후통첩을 받는다.

26일 오후 도청에 있던 시민군은 항쟁파와 투쟁파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인 끝에 20여명이 빠져나간다. 누구도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대신 남아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쓴 결의를 다졌다. 이날 밤 윤석루 시민군 기동타격대장은 보안대로부터 “자정까지 무조건 도청을 비우고 나가라”는 전화를 받고 “공수부대가 들어오면 TNT를 폭파시켜버리겠다”고 결기를 보였다. 도청이 함락된다는 것은 광주 전체가 짓밟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도청과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2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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