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 도시 아이콘이 되다] 〈21〉 도쿄의 작지만 강한 서점들
2018년 04월 23일(월) 00:00
톡톡 튀는 아이디어에 ‘책 덕후’ 응답했다

도쿄의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한 ‘시부야 퍼블리싱 & 북셀러즈’ 전경. 서점의 위기가 현실화 되자 출판인들이 의기투합해 문을 연 ‘출판하는 서점’이다.

지난 2000년 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출판대국으로 불렸다. 전통적으로 책을 가까이 하는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그 어떤 나라 보다도 탄탄한 출판 인프라를 자랑했다. 하지만 2000년 대 중반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온라인 서점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매년 300∼1000개의 서점이 도시나 동네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2015년을 기준으로 지난 10년 동안 무려 7000여 개의 서점이 폐업하면서 1만3500곳으로 줄어들었다.

이 같은 책의 위기에 가장 먼저 ‘응답한’ 사람들은 일본의 출판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도쿄의 ‘시부야 퍼블리싱 앤 북 셀러즈’(Shibuya Publishing & Booksellers), ‘고쇼 니치게쓰도’(古書日月堂), ‘로코 서점’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차별화된 콘셉트를 통해 마니아들을 서가 앞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도쿄 시부야의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주택가에 자리한 ‘출판하는 서점’이다. 지역과 소통하는 문화 사랑방으로 자리잡기 위해 상호에 시부야라는 지역명을 넣었다. 도로 방향으로 커다란 유리창을 낸 매장은 가까이서 들여다 보면 내부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개방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유리창 바로 앞에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주간지나 잡지 등이 비치돼 있어 이 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은 부담없이 서점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시부야 퍼블리싱 서점의 강점은 이름 그대로 출판인들의 북큐레이션을 표방한 ‘출판하는 서점’이라는 것이다. 서점의 위기가 현실로 다가와자 지난 2008년 일부 출판업자들은 북큐레이터 하바 요시타카에게 SOS를 청했다. 2005년 서점, 도서관, 공항, 백화점, 미용실의 서가를 꾸며주는 북큐레이션 회사를 차린 그는 이들의 러브콜을 받고 ‘연대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194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단위로 나눈 특별한 서가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1970년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이 쓴 책을 주제와 상관 없이 1970년대의 서가에 꽂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이는 당시 일반적인 서점의 관행과 거리가 먼 독특한 배치였다. 특히 출판인들은 독서인구의 감소로 출판물량이 줄어들자 소량의 책을 공동 발간해 유통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독자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서점의 가장 안쪽에 출판사를 차렸다. 유리 벽으로 두 공간을 분리해 매장이 넓어 보이는 효과를 냈다.

시부야 퍼블리싱의 서가는 다른 서점과 달리 모던한 분위기의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주로 생활, 예술, 문학, 디자인 , 여행 등 인문학 서적을 취급하며 매장 곳곳에는 자체 제작한 각양각색의 아트상품이 진열돼 있다. 문화·인물에 포커스를 맞춘 잡지 ‘Rocks’ 등 매년 2∼3 종류의 책을 500부씩 소량 출간해 단골들에게 판매한다.





일본의 명품거리 오모테산도 인근에 자리한 ‘네즈 미술관’(根津美術館)은 연중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도쿄의 랜드마크다. 하지만 이 곳을 찾는 방문객들 사이에 화제를 모으고 있는 공간이 있는데 바로 ‘고쇼 니치케쓰도’다. 미술관 건너편의 오래된 아파트 2층에 ‘숨어 있는 듯한’ 서점은 1920년대를 중심으로 한 미술, 디자인, 무용관련 서적을 보유한 고서의 보고(寶庫)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선명한 붉은 색 서가와 세련된 느낌의 인테리어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오타구에서 소설과 만화책을 취급하는 동네헌책방을 운영하던 주인장 사토여사는 어느날 문득 칙칙한 분위기의 서점을 확 바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헌책방이라고 해서 으레 고풍스런 느낌의 인테리어를 고집하지 않고 젊은 세대들의 취향에 맞는 모던한 매장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다. 빨간색은 그녀가 선택한 ‘매직 컬러’(magic color)였다.

‘고쇼 니치케쓰도’는 서점이라기 보다는 아카이브 전시관으로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역사적인 시기(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의 문예사조를 되돌아 볼 수 있는 미술서적, 영화포스터, 디자인 관련 서적, 화집 등 다양한 시각자료를 갖추고 있어서다. 특히 영화 ‘전함 포템킨’(The Battleship Potemkin)의 감독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친필수기 등 사료적 가치가 높은 희귀자료들도 상당하다. 서점의 주 고객은 40대 이상의 중장년층들로 대학교수나 사학자들이다. 소장 자료와 서적은 고서 컬렉터나 옥션을 통해 수집한다.

“오랫동안 헌책방을 운영하는 이유는 옛것에서 새로움을 얻는 온고지신의 가치가 있어서예요. 독자들이 단순히 ‘소비되는’ 존재가 아니라 과거를 통해 성찰하고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도록 보탬이 되고 싶어요. ”



진보초 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로코서점은 일반 책방과는 조금 다르다. 일단 도로변의 1층이 아닌 상업 건물의 4층에 들어서 있는 데다 2명이 동시에 둘러보기엔 몸이 부딪칠 만큼 협소하다. 하지만 가장 큰 특징은 책의 크기다. 일본어로 마메홍(豆本·예쁘게 꾸민 마이크로 북)으로 불리는 미니 책들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연상될 정도다.

가로 10cm·세로 10cm크기의 로맨스 소설에서 부터 가로 2cm·세로 3m의 성경책까지 앙징맞은 책들이 수 천여권 진열돼 있다. 서점 한쪽에 폼 잡고 서 있는 나무로 만든 ‘고케시 인형’과 어우러져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본에 마메홍이 처음 등장한 건 1954년이다. 이후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1990년 대 이후 아는 사람만 찾는 골동품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최근 젊은 여성들 사이에 취미생활로 마메홍 만들기가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서점을 방문하는 고객들이 크게 늘고 있다. 특히 도쿄의 이색 서점들이 관광코스로 부상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젊은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마메홍의 매력은 단편소설이 다 들어갈 만큼 책으로서 가치가 있는 데다 집안에 장식용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상당수의 마메홍은 직접 손으로 책장을 넘겨 읽을 수 있다. 일본의 맥주 브랜드인 산토리에서 제작한 ‘양주 마메 천국’’ 시리즈는 신문 연재물을 모아서 펴낸 것으로 유익한 술 관련 정보 등이 들어있다. 책은 제작방법과 시기, 내용에 따라 10만원대에서 부터 수백만원까지 천차만별이다.



/jhpark@kwangju.co.kr



※ 이 기획시리즈는 삼성언론재단의 취재지원을 받았습니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