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들여다보기] 학포 양팽손과 죽수서원- 김형주
2017년 08월 08일(화) 00:00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에 위치한 죽수서원은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70년에 지역 유림들의 발의로 창건되었고, 같은 해에 ‘죽수(竹樹)’라는 사액을 받았다. 1630년에는 사계 김장생의 건의로 양팽손 선생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다. 죽수서원은 이렇게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다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난 1971년 제주양씨 후손들이 도곡면 월곡리에 복원하였다가 1983년 다시 한양조씨 문중에서 현재 위치로 이설한 것이다.

학포 양팽손(梁彭孫)은 능성(綾城·능주)에서 부친 양이하(梁以河)와 모친 해주 최씨(海州 崔氏) 사이에 태어났으며 자는 대춘(大春), 시호는 혜강(慧江)이다. 13세 때 지지당 송흠(宋欽)에게 수학하였으며 송순(宋純)·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510년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현량과(賢良科)에도 발탁되었다. 이후 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전랑·홍문관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수원부사를 지낸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로 인하여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변동되었지만, 조광조·김정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지켜낸 강직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1519년 10월 과도하게 책봉된 중종반정 공훈자의 공적박탈 조치인 위훈삭제(僞勳削除)로 촉발된 급진개혁파 조광조 일파에 대한 훈구파의 대규모 반격사태인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상소의 주도자(疏頭)로서 나섰다.

기묘사화는 기득권 침탈에 대한 훈구파의 위기의식과 개혁파의 급진적 도학정치 실현에 따른 조정의 반감이 복합된 결과로 나타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삭탈관직 된 후 1519년 향리인 능주로 낙향하여 중조산 기슭의 쌍봉리에 작은 집을 짓고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奇遵)·최산두(崔山斗) 등의 기묘명현들이었다.

특히, 능주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기까지 달포동안 조광조와는 매일 경론을 하였고, 그의 사후에는 양산보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쌍봉사 골짜기에 후히 장례를 치러주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1544년 김안로(金安老)의 사후에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 사임하고 이듬해 별세하였다.

그림에도 일가견을 가진 선생은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으며, 호남 남화의 전통을 개척해낸 선구자로 지칭되고 있다. 저술로는 ‘학포유집’ 2책이 있으며, 회화작품으로 ‘산수도’ 1점이 전해진다.

학포공의 3남인 송천 양응정(梁應鼎)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말년에 처향(妻鄕)인 광산구 박뫼마을에 정착하여, 아들 양산숙 등 쟁쟁한 의병장을 배출하는 의향의 터전을 일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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