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와 청해진 - 김형주
2017년 03월 14일(화) 00:00
장보고는 신라시대 호남 서남해의 강력한 지방세력가로서 본명은 ‘활보’, 즉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였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에 건너간 이후 현지생활에 적응하여 새로이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청년기에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의 장교가 되어 지방군벌의 속성과 군대 통솔방법을 익혔다. 군인들 중에는 양주(揚州)·소주(蘇州) 등지 출신으로 신라와 일본을 내왕하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자들이 많아 그들로부터 상업적인 수완과 정보를 얻었다.

당시는 흉년이 빈번해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했고, 바다에서도 해적이 신라 해안에 출몰해 많은 주민을 잡아가서 중국에 노예로 팔았으며 무역선도 해적의 위협을 받았다. 장보고는 해적들이 무고한 신라인을 잡아가는 것에 대해 분노했으며, 국제무역에 대한 강렬한 욕망으로 인해 스스로 해상권을 장악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볼 야망을 불태웠다.

마침내 그는 828년 귀국하여, 왕에게 남해의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 직접 지원할 만한 여력이 없어, 그는 조정의 승인아래 1만명 규모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독자적 지휘권을 가진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였다.

청해진은 완도 입구의 장도(將島·장군섬)에 위치한 통일신라 말기의 군사기지로 828년에 설치되었다가 851년에 철폐되었다. 이곳은 삼면의 조망이 확 트이고 수심이 깊어 선박의 통행이 용이하고 태풍을 피할 수도 있는 자연적 요새였다. 섬의 둘레에는 약 20㎝ 간격으로 목책(木柵)을 박아 외부 선박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장보고는 신라조정에서 내린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직함으로 서남해 일대의 해상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적소탕과 함께 당나라와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교역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장보고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조직이 거대해지면서, 당시 격화된 신라조정의 왕위쟁탈전에서 패한 김우징 일파가 의탁하게 되었다.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는 정변이 발생하자 김우징일파는 장보고 예하부대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해 신무왕으로 즉위했다.

장보고의 청해진 군사력이 더욱 강성해지자 이에 중앙귀족들은 위협을 느꼈다. 이 무렵 딸의 문성왕비 책봉문제를 둘러싼 장보고와 신라 왕실 간에 대립이 노골화되었고, 장보고는 846년 나라에서 거짓으로 베푼 축하연에서 신라조정이 자객으로 내려보낸 부하장수 염장(閻長)에게 무참히 피살되었다.

여기에서 ‘얄미운 행동으로 남의 화를 돋운다.’는 뜻을 가진 ‘염장지른다’는 말이 유래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써 철옹성 같던 청해진은 마침내 혁파되었고, 이 일대의 주민들은 벽골군(碧骨郡·전북 김제)으로 강제 이주를 당함으로써 23년이라는 짧은 기간의 영화로 끝났다.

장보고는 통일신라의 시기에 대외적으로 크게 활약한 외교가이며 해상 중계무역을 주도한 통상교역의 전문가이자 걸출한 지략을 가진 군사 전략가로서 높이 기려야 할 우리 지역의 자랑스러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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