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노미자씨] 애국지사 셋째 딸 ‘거침없는 하이킥’
할머니 반대로 정치외교 꿈 접고 교사 하다 평범한 결혼생활 중 독일 간 친구 편지에 속 뒤집혀
부친 노병주 선생 설득 이혼 성공(?) 딸 있어 독일 생활 두렵지 않았지
수간호사로 사우디 국왕 가족 진료 재독 한인간호협회 설립 통합 기치 고국 암환자 초대·대학생 교류
2016년 02월 18일(목) 00:00
이 여자의 속살을 봐버렸다. 실루엣이 드러난 웃음이 하얗다. 소녀처럼 날 것 그대로다. 여자와의 만남은 힘들었지만, 막상 멍석을 깔아주자 거침 없이 하이킥이다. 사실 인터뷰 날짜를 잡을 때마다 바람소리가 났다. 재빠르게 돌아가는 선풍기의 프로펠러를 바라보는 것처럼 눈이 빠질 뻔했다. 일흔이 넘은 이 여자, 파독 간호사 노미자(73세).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야 옳았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시계는 거꾸로 흘렀다.

“독일에 먼저 간 파독 간호사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지. 포르투갈로 휴가를 갔다 왔다는 거야. 속을 확 뒤집어놓드라고.”

당시 여자에겐 남편과 세 살난 딸이 있었다. 호기심 때문에 비밀리에 파독 간호사 시험을 치렀다. 사실 그때까지 병원 경험은 없었다. 어릴 때 정치외교학과 지망생이었지만, 할머니가 극구 반대했다.‘여자가 무슨 정치냐’며 순천 간호학교에 입학시켰다. 소독냄새가 싫었고, 꿈에도 간호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 결국 간호학교 졸업 후 거문도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다 여수 돌산 초등학교 교사를 했다. 하지만 그 생활도 금방 싫증이 났다. 이후 여수군 보건소에서 결핵관리요원으로 잠깐 일하다가 평범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막상 파독 간호사 시험에 합격하자, 그야말로 친구 따라 강남을 가고 싶어졌다. 여자는 몰래 독일 행 짐을 꾸렸다.

“합격 소식을 알리고 남편을 졸랐지. 글쎄, 남편이 독일에 가기 싫다는 거야. 난 딸의 장래를 위해서 독일에 가고 싶었는데. 그래서 어떡해? 그럼 딸을 위해서라도 이혼하자고 했지.”

60년대에 여자의 이혼 요청은 당시로선 삼강오륜이 곤두박질 칠 일이었다. 물론 남편은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혼 수속은 여자가 독일에 온 이후에도 계속 되었고, 딸의 의지를 꺾지 못한 아버지의 설득으로 합의이혼에 이르렀다. 여자는 독일 온 지 5년 만에 딸을 데려왔고, 도착한 지 5일 만에 독일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딸이 있는 한, 그녀에겐 두려울 게 없었다. 딸에게 아버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그동안 사귀던 독일 남성과 결혼했다. 여자의 아버지는 딸의 거침없는 행각에 노발대발했다. 아버지는 8명의 자식 중 셋째 딸 노미자를 가장 아꼈다. 기대에 어긋난 딸의 행동에 가장 크게 실망한 이도 아버지였다.

아버지에게 독일인 하면, 무조건 나치 독일이었다. 결국 여자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밤새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여자는 솔직하고 당당했다. 결국 아버지는 손을 들었다. 조건이 있었다. 각서를 쓰라는 것. 첫째, 독일 남편이 한국말을 배워 의사소통이 되어야 하고 둘째는, 어린 손녀를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하라는 거였다. 그런 아버지는 결국 독일 사위 얼굴도 보지 못하고 2년 후 심장마비로 세상과 이별했다. 아버지의 유품에는 독일어 문법책이 있었다. 독일인 사위를 만나면 기죽지 않겠다고 틈틈이 독일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여자의 아버지는 애국지사 노병주 선생이다. 1929년 당시 광주고보 5학년 5반 반장이었던 아버지는 조선학생 궐기대회의 주모자였다. 35만 명의 광주시 인구 중에 3만 명이 참여한 대대적인 집회였다. 그 일로 주동자 73명이 체포되었고, 아버지는 그 중 한 명으로 8개월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었고, 이후 변변한 일을 하지 못했다. 이후 세월 속에 묻혀 있다 여러 지인을 통해 아버지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64년 만에 건국포장을 하사받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지난 후였다.

여자는 196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 이비인후과에서 일을 시작해, 2004년 정년퇴직 때까지 한 우물을 팠다.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당시, 독일 의학협회에서 13명을 선정해 사우디 아라비아 국왕 가족을 진료하고 수술할 기회가 있었다. 일하던 대학병원 의사와 함께 수간호사 자격으로 사우디를 방문했다.

“4박 5일 일정으로 국왕 전용기로 날아갔는데, 역시 돈 많은 양반들이라 다르더군. 당시엔 큰 돈인 5000달러를 주더라고. 최고급 대우에 우쭐했다니까. 간호사로선 잊을 수 없는 일이야.”

간호사가 싫었던 여자였지만, 그 어렵다는 대학병원 수간호사로 인정받고 독일 한인 간호사의 대모격인 재독 한인간호협회를 설립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이후 독일 한인 간호사 단체들이 우후죽순 늘어났고, 그에 따라 반목과 질시 등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분리된 여러 한인 간호사 단체를 하나로 모으기 위한 작업을 착수했고, 2013년 12대 회장에 선출돼 단체 통합의 기치를 올렸다. 지난해 11월 2년 임기를 끝내고, 올해 파독 간호사 50주년 기념사업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는 대구 보건대학과 5년 동안 MOU 협정을 체결해 대학생들의 독일 연수 등을 돕고 있다. 노 씨는 대구 보건대학의 ‘세계로 프로젝트’의 자문교수로 위촉되었다. 또한 유니드 파트너스의 독일 측 의료 코디네이터 독일 연수소장을 맡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독일 파트콘사(ParTCoN GmbH)와 함께 한국의 중증 암환자를 독일로 이송해 하이델베르크, 에센, 드레스덴, 뮌헨, 베를린, 마부르크, 두더슈타트 등지의 대학 및 전문 병원에서 입자치료와 면역세포복구치료 등 다양한 치료를 제공하는 일이다. 고국의 중증 암환자를 돕는 데 앞장서겠다는 게 여자의 포부다. 또 한 번 조국을 위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1년째 프랑크푸르트 한국정원의 관리를 맡고 있고, 파독 간호사들 5명이 모여 ‘디코리스’ 그룹을 만들어 음반 3000장을 만들기도 했다. 작은 여자, 노미자의 활약은 예측 불허다.

이렇듯 나이를 잊고 사는 그녀지만, 손주들 자랑엔 영락없이 평범한 할매다. 독일에서 경제경영학을 공부한 딸은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국제 경제학을 졸업했고,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 딸 둘을 낳고 알콩달콩 살고 있다.

“우리 손녀들이 한국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이번 여름방학에 같이 가자 했지. 내가 한국 갔다가 한국 노트랑 머리핀을 사다주면 손녀들이 뒤집어진다니까. 하하.”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했던 ‘결코 신은 공평하지 않다. 어떨 때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내준다’는 말이 여자를 만나면서 진리처럼 느껴졌다. 퇴적층처럼 쌓인 삶의 궤적이 두툼하다. 말 그대로 탐난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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