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대한 감수성
2015년 12월 03일(목) 00:00
다시, 폭력에 대해 말해야겠다. 6월초 이 지면에서 ‘폭력’이라는 말의 외연(外延,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밝히면서 나는 폭력을 다음과 같이 폭넓게 정의해 보려고 했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더 섬세해질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기를 택하는 순간, 타인에 대한 잠재적/현실적 폭력이 시작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물론 이렇게 말하고 끝날 일이 아니어서, 그 후로도 자주 폭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2월 1일, 조선대학교 ‘문화초대석’ 강좌에 소설가 한강 씨가 초대되었다. 그는 작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를 출간해서 호평을 받은 바 있거니와, 그날의 강의도 그 작품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여느 때와는 달리 조금은 숙연한 마음으로 행사를 진행하던 와중에 나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이제 어느덧 25년이 되었다는 요지의 말을 했는데 그 뒤로도 줄곧 25라는 숫자를 반복해서 말했다. 내가 그랬다는 사실을 행사가 끝난 이후에야 알았다. 2015에서 1980을 뺀 값은 25가 아니라 35다. 물론 실수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따위의 실수를 결코 하지 않을, 아니, 할 수 없을 세월을 살아온 분들에게, 나는 죄를 지은 것이었다. 실수도 폭력이 될 수 있다.

“꽃을 피운 듯 발그레해진 저 두 뺨을 봐.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그 안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가수 아이유 씨의 노래 〈제제〉의 한 대목이다. 학대 받은 아이 ‘제제’(‘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대상으로 이런 식의 캐릭터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제제들에 대한 폭력이라는 비난이 한동안 거셌다. 해석에는 정답이 없으며 해석은 다양할수록 좋다는 (별로 특별하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는 터라, 어떤 해석을 두고 ‘좋은 해석’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해서는 안 될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이유 씨에게 쏟아지는 비난 자체가 이미 폭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무렵 ‘수시 모집 면접’에서 한 학생을 만났다. 봉사활동 기록을 살펴보니 ‘학대 아동 멘토링’을 한 것으로 돼 있었다. 예정에 없던 질문을 던졌다. 〈제제〉에 대한 논란을 알고 있느냐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고.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이유를 물었으나 눈물이 멈추지 않아 대답하지 못했다. 겨우 입을 떼기를, 아이들이 생각나서 운다고 했다. “그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노래를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학생은 아주 여린 진심을 막 꺼내놓은 참이었다. 행여 그 진심에 대한 추궁이 될까봐 질문을 하는 일 자체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래도 한 번 더 물었다. ‘그렇다고 학대받은 아이들은 아프고 슬프니까 따뜻하게 위로해줘야 한다는 내용의 노래만 불러야만 할까. 그것이 본의 아니게 그 아이들을 앞으로도 계속 아프고 슬픈 존재로 머무르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똑같은 시선으로만 보지 말고 다른 모습을 발견해주는 일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제제의 흥미로운 이중성을 노래한 아이유가 그랬듯이.’ 그러자 그 학생은 고요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 이중성 자체가 학대 받은 아이들의 특징이에요.’ 이 말은 나를 흔들어놓았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학대 받은 아이들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고, 그 학생은 안다는 것.

다시 한강 작가의 강연장으로 돌아온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폭력에 대한 묘사가 읽기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는 독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실제 벌어진 일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해서 소설에 쓸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며, 그나마 쓴 것들도 나중에 지웠고 겨우 남은 것이 그 정도라 했다. 한강 씨는 본래 폭력적인 장면을 쓰는 데 특히 더 애를 먹는 작가다.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소설을 쓸 수 있었으리라. 이것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민감해져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평론가·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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