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한여름 밤의 콘서트 - 이중섭 소설가
2025년 08월 25일(월) 00:00
고향 깨복쟁이 친구 중에 별명이 이소룡인 녀석이 있었다. 그 시대 유행하는 쿵후의 영향 탓도 컸지만, 얼굴이 크게 한몫했다. 자연스럽게 브루스 리로 불렸다. 하루 내내 같이 놀던 그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얼굴 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겨우 명절이 되어서야 아이 때처럼 떠들며 얘기를 나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고등학교마저 졸업하고 다들 사회생활을 시작하자 점점 더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도 첫 사회생활에 정신없었고 나도 나대로 처음 맞는 대학 생활에 허덕이고 있었다.

낯선 대학 캠퍼스는 불편했다. 80년 5월이 일어난 지 두 해가 지났지만, 상처는 전혀 아물지 않은 어둑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새내기의 캠퍼스 생활은 어색하면서도 들뜬 구석이 있었다. 거리를 휩쓸던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때문이었다. 등하굣길 상가에서 흘러넘치는 노랫가락이 무작정 귀로 파고들었다. 도시 전체가 이 노래로 넘쳐흘렀다. 오가는 학생들과 온 거리가 몸부림을 치며 이 노래에 취해 있었다. 유행가에 무딘 나조차도 마음이 들썩거렸다. 그렇게 아무런 의식 없이 마음이 붕 뜬 채 하루하루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브루스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 군대 간다!”

뜬금없었다. 잠시 멍하니 그가 전하는 전화기 속의 말을 음미했다. 의문이 들었다.

“머? 아니 우리 나이에 군대서 받아준대?”

브루스는 군에 지원했다고 알렸다. 이제 막 고난의 고등학교를 마치고 푸른 대학교에서 그 누군가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은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소식이었다.

깨복쟁이 친구들은 입대 날짜에 맞춰 시골로 내려왔다. 또래 중에 처음 맞는 입대 송별식이었다. 선후배들과 한바탕 송별회를 치렀다. 밤이 깊어지자, 우리 친구만 따로 동네 우물가에 모였다. 가을이 언뜻 느껴지는 늦은 팔월이었다. 우물 앞 논에는 벼가 검푸르고, 건너편 신작로 오래된 미루나무는 푸름을 멈추고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녹음 속에서 소쩍새가 간간이 뜸을 들이며 울어댔다. 너머로 앞산이 자리 잡고 있고, 그 뒤로 멀리 팔봉산의 여덟 봉우리가 늘어서 있는 하얀 밤이었다.

브루스는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학업에 소홀했는지 남들 다 하는 취직을 하지 못했다. 시골 부모에게 볼 낯이 없고, 게다가 특별히 앞날도 보이지 않아 미리 군대를 마치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우물가에 앉아서 어느 동네 계집아이가 예쁘니, 다른 동네 여자애가 더 낫니 하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갑자기 한 친구가 노래를 부르자 제안했다. 조용한 동네 앞의 우물가 늦은 밤, 느끼한 젊은 사내들의 취기와 군대 가는 주인공을 위한다는 설익은 영웅심으로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용하게 부르던 노래가 갈수록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바탕 난리를 친 후에 주인공인 브루스가 피날레를 장식할 시간이었다.

마침내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처음 듣는 노래였다. 어설프게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며 무언지 모를 그리움을 간직한 멜로디였다. 유행가에 무지하고 맹한 나에게 그의 목소리는 쓸쓸하면서도 감미로웠다.

“왔다가 사라져 간… 파란 꿈은 사라지고…”

노래는 갈수록 구슬퍼졌다. 세상에 이런 슬픈 노래도 있는데 나만 몰랐다고 생각하니 그에게 경외심마저 생기려 했다. 그가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이제 노래는 마무리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행여나 그 님인가, 살며시 돌아서면 쓸쓸한 파도 소리”

노래가 끝나자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왔다. 미루나무에서 고요히 앉아 있던 소쩍새가 박수 소리에 놀라 씨펄거리며 멀리 팔봉산을 향해 퍼덕퍼덕 날아갔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밤의 기운 속에 나는 왠지 녀석이 수놈으로서 나보다 한발 앞서간다고 생각했었다. 군대에 일찍 가는 것도 뭔가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큰 바다를 혼자 헤엄치며 나가는 그의 모습이 건장한 사나이처럼 보였다. 작은 키마저 나보다 훨씬 커 보였다. 모든 면에서 항상 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스무 살의 나 자신이 자꾸만 부끄러워졌다. 군대 그리고 미지의 여성에 대해 어쩔 줄 모르며 미적거리는 사이 그는 이미 뗏목을 만들어 항해를 시작한 탐험자의 모습이었다.

브루스는 아직 푸름이 남아 있는 젊은 시절의 어느 날에 고향과 고국에 지난 삶의 껍질을 모두 남기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진짜 브루스 리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간간이 SNS를 통해 낯선 그의 소식을 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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