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극장 지켜온 영사기 역사속으로
2025년 06월 09일(월) 19:20
18년간 사용한 영사기 노후화로 은퇴 결정…관객들과 마지막 상영회
시민들 고향사랑기부로 5천만원 기부…4K영사기 교체 후 19일 재개관

광주극장에서 지난 8일 영사기 교체를 앞두고 ‘마지막 상영회’가 열렸다. 마지막 상영을 앞둔 영사기 CP2000S의 모습. <광주극장 제공>

지난 8일 올해로 개관 90주년을 맞은 광주극장에서 의미 깊은 상영회가 열렸다. 전국 유일의 단관극장인 광주극장의 디지털 영사기 ‘CHRISTIE CP2000S’가 18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관객들과 마지막 작별을 했기 때문이다. 극장의 심장처럼 영화의 빛을 비춰온 디지털 영사기는 이날 상영을 끝으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이날 오후 7시 30분. 하나둘씩 객석을 채운 관객들은 상영관 내부에 자리한 낡은 영사기를 향해 한 번씩 시선을 건넸다. 대학 시절 이곳에서 수많은 영화를 봤다는 중년의 신사, 주말이면 단골처럼 발길을 옮겼던 이들까지. 모두가 자신만의 기억을 꺼내놓듯 스크린을 바라봤다.

빛이 켜지고, 가상의 신도시 ‘타티빌’을 무대로 한 프랑스 고전 코미디 ‘플레이타임’이 시작되자 관객들은 어느새 스크린 너머로 빠져들었다. 마지막까지 묵묵히 화면을 비추는 CP2000S는 그렇게 또 한 편의 영화를 완주했다.

이날 상영회는 2008년부터 18년간 광주극장의 디지털 상영을 책임졌던 CP2000S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다. CP2000S는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도입된 최첨단 장비였다. 그러나 설치 당시 너무 큰 본체 크기 탓에 영사실이 아닌 상영관 뒤편에 억지로 자리를 잡아야 했던 ‘웃픈’ 사연도 함께 얽혀 있다.

첫 상영작은 2008년 ‘렛 미 인’. 흰 눈이 내리는 북유럽을 무대로 펼쳐지는 흡혈귀 소녀의 이야기가 CP2000S의 빛으로 스크린을 수놓았다. 2009년 ‘워낭소리’의 흥행은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과 함께 영사기에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기술은 빠르게 진화했고, 시간이 흐르며 CP2000S도 서서히 노후화했다. 부품 수급이 어려워지고, 고장 시에는 직원들이 해외 직구로 부품을 구해야 할 정도였다.

이에 광주극장을 사랑하는 관객들과 지역민들이 손을 내밀었다. 시민들은 고향사랑기부제 ‘특정사업기부’를 통해 뜻을 모았고, 그렇게 모인 5000여만원의 기부금은 새로운 4K 레이저 영사기 도입의 밑거름이 됐다. 4K 영사기는 향후 100주년을 향한 광주극장의 새 시대를 밝혀줄 주역이 될 예정이다.

강미미 작 ‘광주극장’
극장의 변화에 마음을 보탠 이들도 있었다. 지역 예술단체 ‘다이나믹스케치그룹(DSG)’ 소속 윤연우, 박성완, 강미미, 최지선, 장다연 작가는 CP2000S를 그린 그림을 극장에 기증하며 정든 영사기의 마지막을 기념했다.

관객들도 진심을 전했다. “여기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봤던 기억이 아직 생생해요.” “영화를 비춰주고, 늘 시간을 지켜준 영사기와 극장에 고마운 마음뿐이에요.”, “이제는 4K로, 광주극장의 100년을 더 함께 걸었으면 해요.”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스크린 너머의 빛에 작별을 고했다.

윤연우 작 ‘영사기’
광주극장 김형수 전무는 “그동안 수많은 작품을 함께했던 CP2000S가 이제는 영사기의 임무를 마무리하고 무대 뒤로 물러나게 됐다”며 “새로운 4K 영사기를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주신 광주시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광주극장의 시간은 ‘play time’, 계속될 것”이라며 “앞으로도 이 공간이 많은 관객의 추억과 만남을 이어가는 장소로 남을 수 있도록 꾸준한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한편, 광주극장은 9일부터 18일까지 영사기 교체를 위한 공사를 거쳐, 오는 19일 재개관한다. 27일부터 7월 6일까지 ‘4K 시네마 광주’ 특별상영회도 마련된다. 18년간 쉼 없이 영화를 비춰온 한 대의 기계가 떠나간 자리,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시간이 쌓이기 시작한다.

/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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