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시(詩)에 물들다- 문길섭 시암송국민운동본부 대표
2025년 03월 03일(월) 21:30
어제 사직공원을 산책하다가 전망대 근처에 있는 이수복의 ‘봄비’ 시비 앞에 잠시 머물렀다. 난 이 시가 우리 서정시의 ‘백미(白眉)’란 생각을 가지고 읽어 내려갔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시 안에 봄을 연상시키는 시어들이 줄지어 있어 좋다. 강나루, 보리밭, 종달새, 아지랑이 등등. 봄이 들어간 말은 모두 정겹고 사랑스럽다. 봄길, 봄비, 봄볕, 봄소풍, 봄처녀, 봄날, 봄꽃….

시 ‘봄비’와 함께 함혜련의 시 ‘내 가슴도 초록물 머금고’를 외면서 봄을 맞이하고 싶다.

“이른 아침/ 눈부신 햇살/ 들판에 깔린 우유빛 안개/ 안개 밑의 초록빛 풀들/ 공중에 뜬 종달새 노래 아침이슬에 어리어 반짝거린다/ 마당가에 자두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포도나무/ 새 눈이 터질 듯/ 부풀어오르고/ 바닷물 소리 바람 소리에 어우러져/ 세계는 바야흐로 새 날을 꽃 피우려는 듯/ 가슴으로 내려쬐는 맑고 밝은 아침 햇살/ 내 가슴도 초록물 머금고 건들면 터질 듯/ 부풀어오른다/ 아, 세상은 아름다운 곳/ 생명의 기쁨이 사방에서 환호치며 터지는 소리/ 천지에 가득해/ 우주도 새싹처럼 통통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이 시는 봄을 뜻하는 용수철(spring)처럼 우리 몸과 마음을 고양(高揚)시킨다. 이런 시를 대하면 ‘대추 한 알’의 장석주 시인이 시의 효용가치에 대해 한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시는 아름다운 것들을 갑절로 아름답게 하고, 좋은 것들은 두 배로 더 좋게 만든다. 그래서 좋은 시는 무지개를 바라보는 것, 기쁨을 주는 음악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허를 기쁨으로 바꾸고, 기분을 화창하게 하고, 메마른 감정을 적셔 생기를 더하게 한다.”

봄을 상큼하게 느끼게 하는 짧고 예쁜 시들도 있다.

“맑은 날/ 초록 둑길에/ 뉘집 아이 놀러 나와/ 노란 발자국/ 콕 콕 콕 찍었을까”(이응인의 ‘민들레’)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함민복의 ‘봄꽃’)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내면// 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빛을 닦아낸다// 내일이면 목련꽃 찾아와 구름빛도 닦으리”(정완영의 ‘초봄’)

이 시들을 가만히 읊조리면 겨우내 더덕더덕 붙은 마음의 때가 다 벗겨질 것 같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만난 조병화의 ‘해마다 봄이 되면’도 봄을 맞는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리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지난 겨울은 계엄과 탄핵소추의 여파로, 혹독한 추위로 여느 해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이제 봄과 함께 모든 어려움이 따뜻한 햇볕에 봄눈 녹듯 하나씩 지나가길 바란다. 말의 폭력, 말의 공해 속에서 이해인 수녀의 ‘시처럼 아름다운 글’도 음미해보면 좋겠다.

“봄과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그는 아마도 늘 희망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따뜻한 사람, 친절한 사람, 명랑한 사람, 온유한 사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 창조적인 사람, 긍정적인 사람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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