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숨결·역사·문화 향기 느끼며…오월, 기억을 걷다
2025년 05월 12일(월) 19:50 가가
[굿모닝예향-2025 광주 방문의 해, 무등산에 오르다]
‘민주 도시’ 광주 품은 대표적인 국립공원
자연이 빚은 주상절리 절경 간직한 서석·입석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람사르 습지 등 지정
생태학적 가치 높고 사계절 다양한 풍광 펼쳐져
57년 만에 인왕봉 정상 시민들에 상시 개방
빼어난 자연 뿐 아니라 역사·문화 가치 풍부
‘민주 도시’ 광주 품은 대표적인 국립공원
자연이 빚은 주상절리 절경 간직한 서석·입석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람사르 습지 등 지정
생태학적 가치 높고 사계절 다양한 풍광 펼쳐져
57년 만에 인왕봉 정상 시민들에 상시 개방
빼어난 자연 뿐 아니라 역사·문화 가치 풍부
광주의 진산(鎭山)인 무등산(해발 1187m)은 예로부터 무진악(武珍岳), 서석산(瑞石山)으로 불려왔다. 또한 21번째 국립공원(2013년)이자 ‘국가지질공원’(2014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2018년)으로 지정돼 있다. 묵논 습지인 ‘평두메 습지’는 생태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람사르 습지(2024년)로 등록됐다. 57년 만인 2023년 9월부터 무등산 인왕봉이 시민들에게 상시 개방됐다. 5월, 무등산자락에 배어있는 역사·문화의 향기를 음미하면서 눈부신 초록의 바다에 ‘풍덩’ 빠져보자.
◇무등산 ‘평두메 습지’, ‘람사르 습지’ 등록= 광주시 북구 화암동 ‘평두메 습지’에 봄이 찾아왔다. 조선 인조때 무신인 전상의 장군 사당인 충민사에서 습지까지는 남서방향으로 1.7㎞ 거리. 과거에 주민들이 짓던 다랭이논이 묵논으로 변했다가 시나브로 자연 회복된 산지형 습지이다.
습지 남쪽에 무등산자락인 평두봉이 자리하고 있다. 광주 북구문화원에 따르면 평두메(또는 평두매) 지명유래에 대해 “무등산 골짜기에 평평하고 넓은 들이 있어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평두매라 했다 한다”고 기록한다.
습지에 들어서면 초록빛깔로 물드는 버드나무와 왕버들 군락이 눈길을 끈다. 묵논이 습지화되면서 자연스레 뿌리를 내린 우점(優占) 수종이다. 과거 다랭이논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습지에는 양서류 8종 등 생물종 800여 종이 서식할 정도로 생물다양성이 풍부하다. 평두메 습지는 이러한 생태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4년 5월에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무등산은 광주를 비롯해 담양, 화순 등 3개 시·군에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이채롭게도 해발 1187m의 산이 140만 여명 규모의 광주를 품고 있다. 그래서 “광주가 어디냐 하면 무등산 아래에 있고, 무등산이 어디냐 하면 광주에 있다”라고 말한다. 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어떠한 존재이고, 어느 만큼의 무게감을 갖고 있을까.
1980년 5·18민주화운동 직후 옛 전남매일신문(광주일보 전신) 기자들은 처음으로 신문을 발행하며 6월 2일자 1면에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시와 함께 무등산 사진을 배치했다. 본래 105행에 달하던 시는 계엄사령부 보도검열에 의해 난도질을 당하며 35행만이 게재됐다. 기사로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엄혹한 상황에서 ‘무등산은 (진실을) 알고 있다’라고 암시하는 항변이었다. (결국 신문은 폐간됐다.)
◇‘육지의 해금강’ 무등산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광주의 옛 이름은 ‘무진주’(武珍州) 또는 ‘무주’(武州)라 했다. 산 이름 역시 ‘무진악’(武珍岳), ‘무악’(武岳), ‘무돌’, ‘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 외에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으로도 불렸다.
“이 산은 역사적으로는 무진악, 문학적으로는 서석산 등 여러 가지로 불리어 왔다. 그러나 무등산이라는 이름은 불교가 이 산의 문화적인 주인 노릇을 맡아보게 된 이후에 이 산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가치의 설명으로 지어낸 이름일 것이요, 지금 세상 사람들이 ‘무덤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등’의 음(音)이 변한 것으로 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노산 이은상 ‘무등산 기행’)
천년고찰 원효사 일주문을 지나 누각(원효루)에 오르면 무등산 절경이 눈앞에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누각 기둥과 기둥사이 네모난 틀은 그대로 사진 프레임 역할을 한다. 아마도 누각에 망부석처럼 오랜 시간 앉아 있다면 팝콘처럼 ‘펑펑’ 터지는 산 벚꽃을 비롯해 초록으로 물드는 경이로운 봄의 색채 변화를 관찰할 수 있으리라.
원효 분소에서 ‘무등산 옛길’을 따라 서석대까지는 4㎞, 인왕봉까지는 4.4㎞ 거리. ‘무등산 옛길’은 호젓하다. 발걸음을 뗀지 40여 분 후 ‘제철 유적지’에 닿는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 장군이 계곡의 사철(砂鐵)을 이용해 철제 무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공간이다. 1992년 발굴조사 결과 제철·정련시설과 화살촉, 철기 등이 발견됐다고 한다. 유적지 위쪽에 ‘의병대장 김 충장공 주검동’(鑄劍洞)이라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무등산 주상절리대를 대표하는 서석대와 입석대에 대한 묘사를 명사들의 기행문에서 찾아본다. 1574년(선조 7년) 음력 4월, 41살이던 제봉(霽峰) 고경명 선생은 무등산을 5일간 여행한 후 남긴 ‘유서석록(遊瑞石錄)’에서 입석대에 대해 “암자(입석암)의 뒤에는 기암이 뾰쪽뾰쪽 솟아 울밀한 것은 봄 죽순이 다투어 나오는 듯하였고 희고 깨끗함은 연꽃이 처음 피는 듯 하였으며, 멀리 바라보면 의관을 정제한 선비가 홀을 들고 읍하는 것 같았고 가까이 보면 겹겹이 막힌 요새와 철옹성에 무장한 병사 일만 명을 나열한 듯하였다”라고 표현했다.
◇57년 만에 시민들에게 상시 개방된 무등산 정상= 옛 사람들을 놀래켰던 기암괴석과 주상절리대는 중생대 백악기 말 화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아득한 8700만~8500만 년 전 일이다.(연구에 따르면 최소 3번 이상 화산 분출이 있었다.) 이러한 지질학적 가치와 역사·문화 요소들의 독창성을 인정받아 ‘국가 지질공원’(2014년 12월)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2018년 4월)으로 공식 인증됐다.
무등산 상봉 이름은 천왕봉·지왕봉·인왕봉이다. 무등산은 광주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자리하고 있지만 무등산 정상에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1966년 7월부터 시민들의 출입이 금지됐다. 서석대와 입석대 출입이 부분 개방된 때는 1990년 5월. 이후 시민들의 지속적인 무등산 상봉 개방운동에 힘입어 2011년부터 연 1~2회 정상부 군부대를 통과할 수 있는 개방 행사가 마련됐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9월부터 인왕봉 정상이 시민들에게 상시 개방됐다. 무려 57년 만에 무등산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와 함께 무등산은 ‘개발’과 ‘보존’의 중심에 있었다. 관(官)의 ‘개발’ 논리에 맞서 시민들은 ‘보전’ 운동을 전개했다. 1982년 추진된 원효사에서 증심사로 이어지는 무등산 일주도로(총길이 5.7㎞) 사업이 대표적이다. 개발에 따른 환경훼손을 우려한 시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원효사~토끼등 구간(2.6㎞)까지만 개설되고, 나머지 토끼등~증심사 구간(3.1㎞) 도로 공사는 1999년에 백지화됐다.
◇무등산이 낳은 ‘분청사기’와 ‘가사문학’= 무등산은 인문(人文)의 산이다. 옛 사람들이 남긴 아스라한 역사·문화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다. 무등산 자락에서 분청사기와 가사문학이 탄생했다.
지난 3월 말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이 광주 북구 금곡동에 재개관했다. 물과 흙, 불의 숨결로 빚어지는 도자기는 전시실에 들어서면 ‘무등산의 사계, 사기장의 일상’을 통해 무등산 일대에서 빚어지던 분청사기의 내력을 파악할 수 있다.
(사)무등산분청사기 협회가 재개관 기념전으로 마련한 ‘분청 새로움을 잇다’(~12월 14일) 전에 선보이는 현대적인 분청사기 제품들과 옛 것을 비교하며 감상하는 묘미를 안겨준다. 전시실 뒤편 요지(가마터) 보호각은 당시 도공들의 숨결을 느끼게 만든다.
무등산자락과 광주호 일대는 가사문학권이다.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 풍암정 등 수많은 누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나주 목사를 지낸 사촌(沙村) 김윤제(1501~1571)가 창건한 ‘환벽당’(環碧堂)을 찾아가본다. 당호는 ‘푸르름을(碧) 사방에 가득 두른(環)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면앙정 송순은 환벽당과 식영정, 소쇄원을 일컫어 “한 동네에 세 군데의 명승이 있다”(一洞三勝)라고 했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등 가사문학이 무등산 자락에서 꽃을 피웠다. 게다가 세 곳은 국가유산청(문화재청)에 의해 ‘국가지정 명승’으로 지정돼 있다.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광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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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26번째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무등산 평두메 습지에서 볼 수 있는 백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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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
1980년 5·18민주화운동 직후 옛 전남매일신문(광주일보 전신) 기자들은 처음으로 신문을 발행하며 6월 2일자 1면에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시와 함께 무등산 사진을 배치했다. 본래 105행에 달하던 시는 계엄사령부 보도검열에 의해 난도질을 당하며 35행만이 게재됐다. 기사로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엄혹한 상황에서 ‘무등산은 (진실을) 알고 있다’라고 암시하는 항변이었다. (결국 신문은 폐간됐다.)
◇‘육지의 해금강’ 무등산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광주의 옛 이름은 ‘무진주’(武珍州) 또는 ‘무주’(武州)라 했다. 산 이름 역시 ‘무진악’(武珍岳), ‘무악’(武岳), ‘무돌’, ‘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 외에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으로도 불렸다.
“이 산은 역사적으로는 무진악, 문학적으로는 서석산 등 여러 가지로 불리어 왔다. 그러나 무등산이라는 이름은 불교가 이 산의 문화적인 주인 노릇을 맡아보게 된 이후에 이 산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가치의 설명으로 지어낸 이름일 것이요, 지금 세상 사람들이 ‘무덤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등’의 음(音)이 변한 것으로 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노산 이은상 ‘무등산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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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
원효 분소에서 ‘무등산 옛길’을 따라 서석대까지는 4㎞, 인왕봉까지는 4.4㎞ 거리. ‘무등산 옛길’은 호젓하다. 발걸음을 뗀지 40여 분 후 ‘제철 유적지’에 닿는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 장군이 계곡의 사철(砂鐵)을 이용해 철제 무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공간이다. 1992년 발굴조사 결과 제철·정련시설과 화살촉, 철기 등이 발견됐다고 한다. 유적지 위쪽에 ‘의병대장 김 충장공 주검동’(鑄劍洞)이라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무등산 주상절리대를 대표하는 서석대와 입석대에 대한 묘사를 명사들의 기행문에서 찾아본다. 1574년(선조 7년) 음력 4월, 41살이던 제봉(霽峰) 고경명 선생은 무등산을 5일간 여행한 후 남긴 ‘유서석록(遊瑞石錄)’에서 입석대에 대해 “암자(입석암)의 뒤에는 기암이 뾰쪽뾰쪽 솟아 울밀한 것은 봄 죽순이 다투어 나오는 듯하였고 희고 깨끗함은 연꽃이 처음 피는 듯 하였으며, 멀리 바라보면 의관을 정제한 선비가 홀을 들고 읍하는 것 같았고 가까이 보면 겹겹이 막힌 요새와 철옹성에 무장한 병사 일만 명을 나열한 듯하였다”라고 표현했다.
◇57년 만에 시민들에게 상시 개방된 무등산 정상= 옛 사람들을 놀래켰던 기암괴석과 주상절리대는 중생대 백악기 말 화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아득한 8700만~8500만 년 전 일이다.(연구에 따르면 최소 3번 이상 화산 분출이 있었다.) 이러한 지질학적 가치와 역사·문화 요소들의 독창성을 인정받아 ‘국가 지질공원’(2014년 12월)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2018년 4월)으로 공식 인증됐다.
무등산 상봉 이름은 천왕봉·지왕봉·인왕봉이다. 무등산은 광주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자리하고 있지만 무등산 정상에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1966년 7월부터 시민들의 출입이 금지됐다. 서석대와 입석대 출입이 부분 개방된 때는 1990년 5월. 이후 시민들의 지속적인 무등산 상봉 개방운동에 힘입어 2011년부터 연 1~2회 정상부 군부대를 통과할 수 있는 개방 행사가 마련됐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9월부터 인왕봉 정상이 시민들에게 상시 개방됐다. 무려 57년 만에 무등산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와 함께 무등산은 ‘개발’과 ‘보존’의 중심에 있었다. 관(官)의 ‘개발’ 논리에 맞서 시민들은 ‘보전’ 운동을 전개했다. 1982년 추진된 원효사에서 증심사로 이어지는 무등산 일주도로(총길이 5.7㎞) 사업이 대표적이다. 개발에 따른 환경훼손을 우려한 시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원효사~토끼등 구간(2.6㎞)까지만 개설되고, 나머지 토끼등~증심사 구간(3.1㎞) 도로 공사는 1999년에 백지화됐다.
◇무등산이 낳은 ‘분청사기’와 ‘가사문학’= 무등산은 인문(人文)의 산이다. 옛 사람들이 남긴 아스라한 역사·문화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다. 무등산 자락에서 분청사기와 가사문학이 탄생했다.
지난 3월 말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이 광주 북구 금곡동에 재개관했다. 물과 흙, 불의 숨결로 빚어지는 도자기는 전시실에 들어서면 ‘무등산의 사계, 사기장의 일상’을 통해 무등산 일대에서 빚어지던 분청사기의 내력을 파악할 수 있다.
(사)무등산분청사기 협회가 재개관 기념전으로 마련한 ‘분청 새로움을 잇다’(~12월 14일) 전에 선보이는 현대적인 분청사기 제품들과 옛 것을 비교하며 감상하는 묘미를 안겨준다. 전시실 뒤편 요지(가마터) 보호각은 당시 도공들의 숨결을 느끼게 만든다.
무등산자락과 광주호 일대는 가사문학권이다.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 풍암정 등 수많은 누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나주 목사를 지낸 사촌(沙村) 김윤제(1501~1571)가 창건한 ‘환벽당’(環碧堂)을 찾아가본다. 당호는 ‘푸르름을(碧) 사방에 가득 두른(環)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면앙정 송순은 환벽당과 식영정, 소쇄원을 일컫어 “한 동네에 세 군데의 명승이 있다”(一洞三勝)라고 했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등 가사문학이 무등산 자락에서 꽃을 피웠다. 게다가 세 곳은 국가유산청(문화재청)에 의해 ‘국가지정 명승’으로 지정돼 있다.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광주일보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