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없는 인생이었다- 고성혁 시인
2025년 01월 22일(수) 00:00
2024년, 그러니까 역사에 기록되고 남을 지난 12월 14일 오후 5시, 밥집이었고 이른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이미 많은 사람이 소주를 마시고 있었던 것은 국회에서 행한 2차 탄핵의 결과 때문이었다. 그 떠들썩한 식당에 별안간 ‘윤석열 탄핵’ 피켓을 든 백발의 늙은 부부가 들어서자 사람들의 눈길이 대번에 쏠렸다. 아내의 친구와 그 남편,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이들이었다. 쏟아지는 환호성에 얼떨떨하던 그들이 양손을 들어 올리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칼바람에 머리칼이 뒤엉킨 채 빨갛게 상기된 두 얼굴. 그분들의 손을 붙잡자 얼음처럼 차가운 감촉이 머리를 타고 올랐다.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던 나는… 내가 너무나 염치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피로 얼룩진 80년의 오월과 망월동에 나부끼던 만장들…. 그 후 어쩌다 근무하게 됐던 도청에서 날마다 바라보곤 했던 벽과 벽 사이의 무수한 탄흔. 그날을 증언하듯 서 있던 정문 옆 은행나무와 의회 앞 회화나무, 오월이면 성난 시민들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지던 육중한 철제 정문의 삐걱대던 소리. 그 광경을 잊고 살다니. 이제 그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 하느님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사십오 년 전 그때부터 말단공무원이라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며 눈을 감은 채 로봇처럼 살았던 나를 상기하노니 내 인생이야말로 허수아비와 진 배 없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얼치기였고 내 삶은 허접쓰레기였다. 그렇게 살아온 칠십 년. 젊을 때부터 민주화에 몸 바치다 감옥에 가고, 해직교사로 떠돌던 그들은 그 시절과 다름없이 칼바람 부는 겨울 광장에서 시린 몸으로 목청껏 탄핵을 외쳤는데 나는, 그렇게 남의 머슴처럼 살아 이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이런 불온한 세상과 맞닥뜨려 그동안의 삶에 한 점 고뇌 없이 끄덕끄덕 따뜻한 밥집에 앉아 기다리고만 있었다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런 사이, 나만 모르고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대문간에 숨어 바깥 동태를 살피는 사이, 세상은 아름답게 진보해 있었다. 구백 명의 5·18 증언을 한 달간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하고 ‘소년이 온다’를 쓴 한강 작가는 그 뒤에도 3년 동안 제주에 살면서 4·3을 손금처럼 파악한 뒤 ‘작별하지 않는다’를 썼다.

화염병에서 촛불, 그리고 응원봉으로 무기를 바꾼 시대를 앞선 청년들은 ‘고양이발바닥연구회’ 혹은 ‘아무것도하기싫은사람들의모임’ ‘전국나쁜사람퇴치연맹’ ‘6호선을타는사람들의모임’이라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기지 넘치는 이름으로 여의도의 헬기와 장갑차를 뚫고 기어이 탄핵을 얻어냈다. 영하의 날씨에도 남태령 트랙터 시위를 도와 경찰버스를 뚫고 용산까지 행진한 젊은이들과 그 와중에도 추위에 떠는 시위 참가자들에게 커피를 선결제한 이름 모를 경찰관…. 이 뉴스에 달린 ‘도대체 왜 세계는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동시에 아름다울까?’라는 댓글에 나는 기어이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5·18의 새벽,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가 죽은 박용준 열사의 일기를 본 한강 작가는 그의 뜨거운 외침에 ‘죽은 자가 산 자를 구원할 수 있다’는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삶은 쉬운 게 아니다. 자기 삶을 들여다보고 죽을 힘을 다할 때야 비로소 세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12·3 내란 뒤 5·18을 상기하는 글의 ‘고립된 상태에서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내 인생 전체를 이분들께 빚졌다’라고 쓰인 댓글을 마주하고는 결국 뚝뚝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지, 세월은 또 어떻게 흐르는 것인지…. 하지만 ‘눈먼 무사-앉은뱅이 주술사’와 무도한 내란 음모세력들이 여전히 준동하고 법원을 침탈하는 세력까지 출몰하는 지금, 생각만으론 이 커다란 불의를 감당할 수 없다. 늙은 몸이라도 함께해야 한다. 다가오는 봄에도 이 땅의 나무들은 어김없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야 한다. 언제나처럼 강물은 출렁이며 흘러야 한다. 비록 산화된 쇠처럼 무뎌지고 녹슨 몸이라도 저 아름다운 청년들이 거침없이 지나갈 수 있게 눈이라도 치우고 길이라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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