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에 강제동원된 최점덕 씨 “생계 책임지는 아버지 대신 강제 동원 집에는 “나물 캐러간다” 말하고 나섰죠”
2025년 01월 19일(일) 20:55
[광복 80년 되짚어 본 광주·전남 아·태전쟁 유적]<2>
“이 세상은 금년으로 난 세상이요 부모형제 이별하고 타향에 나와 밤잠 못자 금전 벌어 어데다 두고 집이 계신 부모님이 오신다해도 내 맘대로 쓰지 못한 금전이로지.”

1945년 봄, 11살 나이에 광주시 북구 임동 가네보방직에 강제동원됐던 최점덕(여·92·사진)씨가 동료 소녀공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다. 최씨는 수십년이 지나도 그때 불렀던 노래를 잊지 못한다.

보성에 살던 최씨는 1945년 일제가 아버지를 가네보 방직에 동원하려는 사실을 알고 맏이인 본인이 가겠다고 대신 나섰다. 가장인 아버지가 동원되면 혼자 남게 될 할머니와 남은 식솔들의 끼니가 걱정 됐던 탓이다.

최씨는 그해 봄, 부모님에게 “나물캐러 간다”고 말하고 바구니를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본인이 대신 간다고 말하면 못가게 할 것 같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골목에 잠시 숨어있던 최씨는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 벌교역에서 구장(모집원)의 차를 타고 광주에 도착했다. 당시 구장의 차에는 어린 여자 아이들이 많았고 마을에서는 주로 형제끼리 짝지어 차출됐다. 그 중에서도 최씨는 어린 축에 속했다. 돈에 대한 개념도 없이 아버지를 보내기 싫다는 마음 하나로 낯선 땅 광주에 도달한 것이다. 가네보 방직은 어린 소녀공들에게 가혹한 공간이었다는 것이 최씨의 회상이다. 그가 기억한 당시 공장 환경은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삶아진 번데기를 가시에 너는 일을 했다. 식사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 톳으로 쌀을 대신해 먹거나 너무 배고플 때면 널어놓은 번데기가 바닥에 떨어지면 물에 씻어 먹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어린 그를 가혹하게 때리고 굶기는 일은 없었지만 언니들인 소녀공들이 매맞으면서 일하는 건 일상이었다.

최씨의 아들 조포현(63)씨도 어머니가 이따금 이야기했던 가네보 방직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

조씨는 “어머니가 옛날에 외할아버지를 대신해 가네보방직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종종했다”면서 “바느질과 재봉틀 돌리는 일을 (어머니에게) 맡겼는데 어른용 기계라 발과 손이 닿지 않아 일 대신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급여를 받아도 돈에 대한 개념이 없다보니 모조리 사물함에 넣어뒀고 다음날 사물함에 가보면 (다른 사람들이 훔쳐가서) 텅 비어있었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김다인 기자 kd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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