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교사가 된 대통령- 강대석 시인
2025년 01월 14일(화) 21:30 가가
지난 9일 채 해병 사망사건과 관련하여 군 검찰로부터 3년 구형을 받고 재판을 받던 박정훈 대령이 1심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정당한 업무처리를 하고도 누군가의 외압에 의해 한 순간에 사건이 뒤집혀 피의자가 된 박대령에게 법원이 손을 들어준 것이다. 억울한 박대령을 위해 응원하던 수많은 해병대 선후배들의 환호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2년6개월은 상식을 뛰어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끊기지 않았던 무속논란, 거친 언행,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행보는 그가 명문대를 나온 검찰총장 출신이었는지 믿기지 않았다. 오직하면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누가 뻘짓을 하면 “니가 윤석열이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처음 그가 국민의힘 대선후보자 토론회에 세 차례나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나왔을 때 국민들은 그를 다시 봤어야 했다. 전 국민이 보고 있는 TV-토론회에 대선 후보자가 손바닥에 ‘王’자를 쓰고 나온 다는 것은 간과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공정과 상식’을 기대하며 그를 밀어주었다. 그가 당선되어 맨 처음 한 일은 대통령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긴 일이었다.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대통령실과 관저 이전사업을 타당성 조사와 같은 기본적인 검토도 없이 두 달 만에 뚝딱 밀어붙였다. 국민과의 소통이 이유였지만 그 이면에는 명태균과 천공 등 무속인의 입김 때문으로 알려졌다. 경악할 일이었다. 무속논란은 취임 후에도 영국여왕이 서거 했을 때 늑장조문으로 다시 이어졌고, 심지어 의대증원 2000명에도 개그 같은 뒷말이 무성했다.
그의 거친 언행도 말썽이었다. 대선 후보자 땐 신발을 신은 채 열차의자에 발을 올려놓았고 취임 후 미국 방문 땐 ‘바이든 날리면’ 사건으로 논란을 일으켜 방송사와 기자를 고발하는 등 언론에 재갈을 물리더니 총선 직전에는 정책 전환을 요구하는 국회의원을 입틀막 하여 들어냄으로써 독재정권을 연상케 했다.
일방적 친일정책도 문제였다. 이웃나라인 일본과의 관계를 우호 증진하자는데 반대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뉴라이트 사관에 젖어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육군사관학교에서 들어내고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하여 일본 정부를 대변하듯 반대 여론을 억압하며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에 찬성하는 등 일방적 굴욕 외교로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는 이미 보수정권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김건희 여사는 윤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족쇄였다. 주가조작 의혹, 양평고속도로 노선변경, 명품백 수수 사건, 공천개입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명태균이 검찰에 출두하며 “내가 구속되면 한 달 안에 윤 정권은 무너진다”는 말이 그냥 엄포가 아니었다. 명태균의 황금폰은 그것을 증명하듯 계속 열리고 있다.
그의 사고는 70년대 중반에서 멈춘 것 같았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들었던 종북, 반국가세력, 주사파 등의 용어가 새롭게 등장했다. 대선에서 0.73%의 차이로 겨우 이겼으면 천행(天幸)으로 생각하고 국민 통합을 위해 협치를 했어야 했다. 국민이 총선에서 선택한 여소야대의 의미는 독주하지 말고 협치하라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 독재를 못하도록 견제하라는 의미가 더 컸다. 그러나 여소야대 구도가 부정선거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극우 유튜버의 선동에 빠져 판을 뒤엎기 위해 비상계엄을 준비하고 선포했으니 정말 ‘윤석열’스럽다. 협치와 포용으로 풀 수 있는 정치적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다 결국 권좌까지 잃게 되는 비극을 자초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외에도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가 주장하는 법과 원칙은 상대방에겐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고 자신과 가족에겐 더없이 관대한 것이었다.
지금도 측근들이 모두 내란죄로 구속되는 상황에서 혼자만 정당성을 주장하는 적반하장 태도는 한국정치사에서 두고두고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처음 그가 국민의힘 대선후보자 토론회에 세 차례나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나왔을 때 국민들은 그를 다시 봤어야 했다. 전 국민이 보고 있는 TV-토론회에 대선 후보자가 손바닥에 ‘王’자를 쓰고 나온 다는 것은 간과할 일이 아니었다.
일방적 친일정책도 문제였다. 이웃나라인 일본과의 관계를 우호 증진하자는데 반대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뉴라이트 사관에 젖어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육군사관학교에서 들어내고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하여 일본 정부를 대변하듯 반대 여론을 억압하며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에 찬성하는 등 일방적 굴욕 외교로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는 이미 보수정권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김건희 여사는 윤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족쇄였다. 주가조작 의혹, 양평고속도로 노선변경, 명품백 수수 사건, 공천개입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명태균이 검찰에 출두하며 “내가 구속되면 한 달 안에 윤 정권은 무너진다”는 말이 그냥 엄포가 아니었다. 명태균의 황금폰은 그것을 증명하듯 계속 열리고 있다.
그의 사고는 70년대 중반에서 멈춘 것 같았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들었던 종북, 반국가세력, 주사파 등의 용어가 새롭게 등장했다. 대선에서 0.73%의 차이로 겨우 이겼으면 천행(天幸)으로 생각하고 국민 통합을 위해 협치를 했어야 했다. 국민이 총선에서 선택한 여소야대의 의미는 독주하지 말고 협치하라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 독재를 못하도록 견제하라는 의미가 더 컸다. 그러나 여소야대 구도가 부정선거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극우 유튜버의 선동에 빠져 판을 뒤엎기 위해 비상계엄을 준비하고 선포했으니 정말 ‘윤석열’스럽다. 협치와 포용으로 풀 수 있는 정치적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다 결국 권좌까지 잃게 되는 비극을 자초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외에도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가 주장하는 법과 원칙은 상대방에겐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고 자신과 가족에겐 더없이 관대한 것이었다.
지금도 측근들이 모두 내란죄로 구속되는 상황에서 혼자만 정당성을 주장하는 적반하장 태도는 한국정치사에서 두고두고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