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오르내리며 관람하는 ‘장소특정형 연극’
2024년 11월 11일(월) 15:10
광주시 동구, 10년후 그라운드 ‘시간의 숲, 무등’ 8일 무등산 일원서
의재 허백련, 오방 최흥종 등 광주 인물들 삶과 무등산 연관성 조명

광주 동구와 10년후그라운드가 도슨트 투어·장소특정형 연극 복합 프로그램인 ‘시간의 숲, 무등’을 오는 15일까지 운영한다. 김슬지(왼쪽), 최진영 배우가 춘설헌 앞에서 연기하는 장면.

삼애 사상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일군 ‘의재 허백련’, 나병 환자의 외침에 귀 기울였던 ‘오방 최흥종’ 그리고 조국에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석아 최원순’. 세 사람은 광주 출신이라는 점 외에도 무등산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지난 8일 도슨트 투어·장소특정형 연극 ‘시간의 숲, 無等’ 현장. 참가자 20여 명 시민들은 저마다 들뜬 모습으로 산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행사는 광주 동구와 10년후 그라운드가 지난 5월부터 총 12회 의재미술관 일원에서 선보인 프로그램으로, 도슨트 투어에 이어 인문산책길 ‘무등가는 길’의 주요 스팟을 이동하며 장소특정형 연극(이동극)을 즐기는 방식이다.

참가자들은 등·하산 과정에서 각기 다른 경험을 마주한다. 증심사 주차장에서 시작한 상행 코스는 문빈정사, 증심교, 춘설헌 등 의재·오방·석아의 숨결이 깃든 명소를 둘러보는 순서였다.

남농화 대가인 의재 허백련 역을 맡은 이명덕 배우가 의재미술관 내부에서 노래하는 장면.
먼저 참가자들은 김미영 문화해설사와 함께 산을 오르며 세 인물에 얽힌 비화를 들었다. 증심교 앞에서는 의재가 단돈 20원을 들고 일본에 유학을 가 고군분투했던 이야기, 경찰서 유치장에서 숙박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오방이 나병 환자를 구제하기 위해 진행했던 구라(救癩) 행진도 흥미로웠다. 이외 신림마을 표지석이나 농업학교 학생들과 차를 제작했던 물레방아 공간도 볼 수 있었다.

“마음을 갈고 닦아서 우리 산수를 비추는 그림/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소/ 내가 조선을 그릴 수만 있다면….”

의재미술관에 도착해 춘설차를 즐기던 사이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호남지역 최초의 여의사 현덕신으로 분장한 유피시어터 소속 김슬지 배우의 독창이다. 김 씨는 이날 공연의 스토리텔러 역할을 맡아 관객을 춘설헌, 문향정 등으로 이끌었다.

청년기 의재 허백련의 모습을 한 이명덕 배우도 미술관 복도를 가로질러 천지인(삼애) 사상과 공동체정신을 투영한 노래를 불렀다. 밖이 내다 보이는 미술관 유리 벽면은 무등산 가을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자연이 그린 여섯 폭 병풍 같았다.

오방 최흥종 역을 맡은 배광희 배우가 ‘사망 선고서’를 낭독하며 오방의 결기를 표현하는 모습.
“1935년 3월 17일 이후, 나 최흥종은 죽은 사람임을 알리는 바입니다(…)가정에 대하여 오만한 자, 사회에 대하여 방일자, 사업에 대하여 방종한 자. 종교에 대하여 방랑자로… ”

이어 스토리텔러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선 관객들은 돌계단 위에 서 있는 오방 최흥종(배광희 분)을 마주한다. 그는 자연이라는 가설 무대를 활용해 자연스럽고 진중한 연기를 펼쳤다.

1935년 최흥종은 자신의 아호를 오방(五放)이라 정하고 주위 지인들에게 사망 통고서를 돌렸다. ‘오방’이란 다섯 가지의 집착을 놓아버린다는 의미로 ‘사회적 체면’, ‘집안의 일’, ‘경제적 이익’, ‘정치적 활동’ 및 ‘종파적 활동’을 의미한다. 배광희 배우는 이처럼 세상 만사에 초연하고자 했던 오방의 일화를 비롯해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고 통곡했던 장면 등을 열연했다.

무대가 된 문향정은 의재가 춘설차를 보급하기 위해 세운 공간이다. 조금 더 깊은 공간에는 관풍대와 삼애다원, 의재 소묘 등이 자리해 향후 예술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춘설헌 앞에서 펼쳐진 클라이맥스. 왼쪽부터 이명덕, 김슬지, 최진영, 배광희 배우.
공연은 1956년 남농 김용구의 설계로 지어진 춘설헌에서 막을 내렸다. 이 공간은 독립운동가 석아 최원순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석아정’이란 현판을 붙였으나 최흥종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오방정’으로 이름이 바뀐 바 있다.

춘설헌에 도착하자 석아 역을 맡은 최진영 배우는 관객들에게 ‘요즘 가장 인기있는 주식’이 무엇인지 물었다. 물론 이 또한 극의 일부,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가에게 주식은 암호였다고 한다.

/글·사진=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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