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과 깨달음이 있는 맛깔스러운 산문
2024년 10월 25일(금) 00:00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 이광이 지음
“아침에 세수하는 손가락 사이로 왔다가 저녁에 양말 벗는 발가락 사이로 하루가 가버린다 하더니, 세월이 참말로 그렇지 않으요?”

정월 어느 날, 아들의 말에 팔순이 넘은 노모가 답한다. “아야, 바닷가 펄 밭에서 자잘한 칠게 잡아 놓은 통발 있지? 그것이 엎어지면서 게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잖아. 얼마나 빠르냐? 설날 뚜껑을 열면 삼백예순 날들이 저 칠게 마냥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드라.” 그리고 노모는 덧붙인다. “그 손가락 발가락 얘기는 아침에 세수하고 나서 저녁 때까지 많이 걸으라는 얘기 같다”고.

이렇게 재미있는 산문집이라니. 전직 언론인 이광이 산문집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는 한 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 없다.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고, 회한이 있다. 그러다 ‘아’ 하는 깨달음이 오고, 먹먹해지고 만다. 여기에 맛깔스런 전라도 사투리까지 첨가되니 읽는 맛이 쫄깃하다.

책에 실린 60여편은 한겨레 ‘삶의 창’ 연재분과 지난 10년간 써 온 글들이다. 작가 소개 글에 “해학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첫 글 ‘헤어 소수자의 길’부터 빵 터진다. 주변머리가 절반은 남아 ‘오할스님’으로 불리는 그는 어느 날부터 가발을 착용하지만, 결국 ‘모(毛)밍 아웃’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오늘밤에도 바람이 두피에 직접 스치우는” 삶을 살고 있다.

“삶은 고고하지 않다. 삶은 베토벤 작곡에 이미자 노래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저자는 삶이 막힐 땐 고전을 읽는다. 읽다가 막히면 “쓴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냐?”는 마음으로 계속 읽어나가고 허균의 ‘한정록’이나 ‘공자가어’의 공자와 자로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또 조계종에서 일하면서 연을 맺은 도법스님과 주고 받은 대화를 비롯해 불가의 이야기는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전을 귀신 같이 잘부친다고 해서 ‘전신(煎神)’으로 불리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춤추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엉덩이 같은 휘어진 기둥”을 만나는 개심사에, 강진의 월남사지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어진다. ‘가을처럼 좋은 영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주연의 ‘마지막 사중주’와 영화 속에 흐르던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14번’, 멘델스존의 ‘무언가’의 선율에도 귀기울이게 된다.

책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엄니’ 최봉희 여사도 인상적이다. 1958년 ‘자유문학’으로 등장했던 엄니는 세월호 참사 후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별이 되어 떠난 아이들이 되기도 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이웃이 되기도 한 마음”으로 57편의 시를 쓰고 묶어 ‘5·18 엄마가 4·16 아들에게’를 펴냈다. 자식들이 준 용돈을 모아 한희원미술관에서 4호짜리 강렬한 붉은 장미 한점을 사 집에 걸어두고 “그림이 시 같지 않냐”며 흐뭇해하던 엄니는 2021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삐삐북스·1만6800원>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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