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교차로에서 빛난 부다페스트 2천년 역사
2024년 10월 11일(금) 14:00
부다페스트-빅터 세베스티엔 지음, 박수철 옮김
“역사 내내 우리 헝가리인들은, 대개의 경우 홀로 동양과 서양 사이의 다리 역할을 맡았고, 그 결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동양의 침략자들이 초래한 위기와 파괴 행위로부터 서양의 기독교 문명을 여러 차례 구했습니다.”

지난 2016년 4월 당시 헝가리 총리 오르반 빅토르의 연설 속에 헝가리와 부다페스트의 역사와 정체성이 녹아있다.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수도이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는 국가로서의 헝가리보다 더 오래 됐다.

2000여 년 전부터 다뉴브 강(헝가리어로는 두너 강)을 끼고 형성된 두 도시, 부다(Buda)와 페스트(pest)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지리적 관문이자 전략적 위치 때문에 수많은 침략을 겪어야 했다. 로마군-마자르 부족-몽골 군-오스만 군-합스부르크 왕가-나치군-소련군 등 침략자들이 차례로 부다페스트를 수십~수백 년 동안 점령하고 통치했다. 이러한 수난의 역사 속에서 부다는 13차례 포위되고 5차례 완전히 파괴됐다고 한다.

신간 ‘부다페스트-화려한 영광과 찬란한 시련의 헝가리 역사’는 기자인 저자 빅터 세베스티엔이 20대 초반이던 1970년대 중반부터 수십 년 동안 150차례 도시를 방문해 발로 쓴 ‘부다페스트 연대기(年代記)’이다. ‘냉전과 현대 헝가리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평가받는 ‘1956년 혁명’때 갓난아기였던 저자는 부모와 함께 난민 신분으로 헝가리를 탈출했다.

헝가리 ‘1956년 혁명’ 때 부다페스트 시민들에 의해 파괴된 스탈린 동상. <위키미디어 커먼즈 제공>
저자는 1부 마자르인, 2부 합스부르크 왕가, 3부 세계대전으로 나눠 부다페스트와 헝가리의 영광과 시련의 역사를 풀어낸다. 1세기 초반 다뉴브 분지에 군영을 세운 로마군은 이곳을 ‘아퀸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67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곳에 머물며 ‘명상록’ 일부를 썼다.

저자가 들려주는 부다페스트와 헝가리의 영광과 시련은 생경하다. 9세기 카자흐스탄 동부 대초원지대에서 서쪽으로 이동해 다뉴브 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마자르 족은 아르파드 왕조를 이루고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로마와 비잔티움 사이에서’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고 서양의 문화적 방식을 받아들이며 300여 년 동안 지속한다. 1241년 몽골군의 침공은 ‘온통 폐허와 시체와 황무지’만 남길 정도로 참혹했다.

특히 책을 읽는 동안 1560년대부터 커피를 접한 부다페스트의 카페 문화가 눈에 띈다. 150년 동안 헝가리를 지배한 튀르크 인들은 장미와 커피, 목욕탕, 파프리카와 같은 문화 흔적을 남겼다. 1848년 헝가리 혁명은 카페에서 시작됐고, 시인 쾰체이 페렌츠는 카페에서 헝가리 국가 가사를 지었다. 저자 역시 카페에서 글을 썼다.

2000여 년 이어지는 유장한 부다페스트와 헝가리의 역사는 세계사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 2차 세계대전기의 유대인 학살과 1956년 헝가리 혁명, 1989년 ‘철의 장막’ 종식과 독일통일 등 격동의 역사가 헝가리 땅을 무대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592쪽 분량의 신간은 독자들에게 부다페스트를 중심으로 헝가리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새로운 창(窓)을 열어젖힌다. 문득 다뉴브 강을 낀 부다페스트 카페에 앉아 커피와 함께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까치·3만원>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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