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평가 - 오광록 서울취재본부 부장
2024년 08월 08일(목) 22:00
1987년, 광주의 한 중학교 교실에서는 알파벳을 간신히 뗀 까까머리 중1 학생들이 영어 듣기평가를 받고는 했다. 신생 학교가 빠르게 성적을 올리는 방법은 잦은 매타작이었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구분도 힘든 영어 듣기평가가 끝나면 아이들의 엉덩이는 초여름 석류처럼 붉게 멍들었다. 하지만 교실 바닥에 엎드린 친구들의 엉덩이가 파도치듯 들썩이는 것을 느긋하게 구경하는 만점자도 있었다.

당시 원어민의 유창한 발음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판매했고, 상당히 비쌌다. 시험도 이 테이프에 담긴 테스트가 그대로 나오곤 했다. 문제는 대다수 아이들이 이 테이프를 살 수 없었다는 것. 그래도 살아날 방법은 있었다. 같은 반에 카세트테이프라는 ‘치트키’를 확보한 복 받은 아이들의 지나친 자신감이 믿을 것은 엉덩이밖에 없던 아이들에게 힌트를 주곤 했다. 미리 테이프를 통해 문제를 충분히 숙지한 아이들은 질문에 대한 예시가 나올 때 몸이 먼저 반응하곤 했다. 1~4번까지 예시를 다 듣지 않고도 그들은 답을 알고 있어 시험지에 표기를 한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알아챘고, 이들이 움직일 때 함께 해당 예시에 동그라미를 치면 정답일 확률도 높았다.

정치 관련 여론조사가 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통령 지지율뿐 아니라 차기 대선 잠룡에 대한 지지율을 묻는 여론조사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한국의 여론조사 정확도는 높은 편이다. 각종 선거에서 진행되는 출구조사는 놀라울 정도의 정확성을 갖고 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여론조사가 ‘판단을 위한 하나의 자료’라는 사실이다. 많은 정치인은 일종의 팬덤을 확보하고 있고, 이들 추종자들은 여론조사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또 여론조사 기법상 상대적으로 응답률이 낮은 연령과 성별에는 가중치를 주기 때문에 적은 표본은 여론을 왜곡할 수 있는 부작용도 따른다. 몇 몇 정치꾼은 이런 점을 악용해 가중치를 주는 연령과 성별에 자신의 지지층을 배치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여론조사를 너무 맹신하다 보면, 남들 따라 시험지에 동그라미 치다가 정작 영어 한마디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던 중학생들의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

/kro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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