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강둑을 걷다-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08월 04일(일) 21:30 가가
화순의 강둑을 걷는다.
길을 걸으면 강과 함께 걷게 되고 강을 따라 걷다보면 또한 길과 함께 걷는다. 어느 곳을 걷든 우리 삶은 강에서 시작하여 강으로 끝난다. 모든 길은 강으로 뻗어있고 또 강은 모든 마을, 모든 역사로 이어져 있다.
산과 마을에서 내려온 정령들이 흘러드는 물길을 따라 걸으면서 사람을 만나고 마을을 보고 삶을 생각한다.
비는 호남정맥인 무등산, 별산, 천운산, 두봉산, 남쪽으로 떨어지면 보성강 섬진강이 되고, 북쪽으로 떨어지면 지석강 영산강이 된다.
그 남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용암산과 예성산 사이에서 예성강이 된다. 베 짜던 여인이 자신을 탐한 왜장을 끌어안고 죽었다는 붉은 전설을 품고 있는 베틀 바위를 지나 최경회, 문홍헌, 조현 등 충절을 기린 삼충각 앞 충신강에서는 어느새 붉은 백일홍보다 더 시붉게 흐른다. 그리고 다시 능주에 이르러 영벽강이 되어 푸르게 푸르게 연주산을 휘돌아 나간다.
중장터 앞으로 흐르는 청강, 용강은 비나리에서 돌로 된 보(洑), 돌폿강으로 변신한다. 보는 나루인 배를 댈 수 있는 곳, 몸피를 키운 강은 남평 우진에서 구름개 달개 꽃개라는 이름도 마을도 희미해져 가는 도암의 포구를 끌어안고 다시 오들강이 되고 그것도 아주 잠깐 가난한 아가씨의 슬픈 전설이 서린 드들강인 지석강이 된다.
강을 따라가며 수많은 사람과 마을, 전설과 이야기를 만난다. 마을마다 각기 고유의 이야기를 품고 있듯이 강 또한 그러할진대 이런 강을 천(川)으로 예속화하거나 모두 영산강으로 통칭하기엔 너무도 아쉽다.
산이 뻣뻣한 남자라면 강은 사근사근한 여자고, 산이 단단한 뼈라면 강은 유연한 핏줄 같다. 이런 개성 있는 강처럼 그 강을 닮은 사람들 역시 각기 지역 색을 띠고 산다. 그러니 강마다 고유의 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강들도 영산강이 아닌 비로소 생명력 있는 고유의 강이 되고, 각기 존재의 강이 되고, 지역의 특성이 되지 않을까.
강둑을 걷는다. 건너편을 바라본다. 우리 인간도 찰나에 섬진강이 되기도 하고 영산강이 되기도 한 존재처럼 호남정맥 사이로 떨어지는 빗물 같은 운명을 사는 것 같다. 그래서 건너편은 항상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경의 장소였다. 제우스의 육신을 보고 싶어 한 세멜레와 하늘 마차를 몰고 싶어 한 파에톤처럼….
희망의 강이자 절망의 강은 신화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실제로 호기심과 두려움을 함께 자극하며 흐른다. 그래서 강을 걷는다는 것은 생사를 걷는 길이고, 삶을 읽는다는 의미가 된다.
아버지의 상여도 마을 앞, 강을 건넜다. 난 삼도천을 건너는 아버지의 꽃상여를 보면서 깃털도 가라앉는 카론의 강을 늘 떠올린다. 죽음보다 더 삶을 빛내고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강을 걸을 때마다 난 방전된 내 삶에 에너지를 빵빵하게 충전한다.
해질 무렵 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들처럼 힘차게 살고 싶다. 그러면서도 그 생명들의 모천, 위에서 언제나 아래로 흐르는 겸손, 막히면 슬기롭게 돌아갈 줄 아는 지혜, 작은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 어떤 형태도 고집하지 않고 담길 수 있는 융통성 있는 물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화순의 꽃길 강길, 꽃강을 걷는다. 꽃이 많아서 꽃강 길이 아닐 것이다. 아름다워서 꽃강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꽃강을 걷는다. 내 말을 들어주고 내게 말을 건네 오기도 하는 강, 때론 꽃잎을 싣고 흐르기도 하고 내 모습을 비춰주기도 하는 강. 화순의 다양한 빛깔의 강을 바라보면서 정녕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돌아본다. 저 강물처럼 흘러온 인생, 맑게 또는 붉게 흐르기도 했고 때론 혼탁하게 흐르기도 했을 것이다. 혹여 그도 저도 아니게 흘러왔다면 이제부터는 조용조용 낮게 흘렀으면 좋겠다. 남은 생은 화순하게 흐르고 싶다.
화순을 흐르는 화순 강에서 화순한 삶을 배운다.
길을 걸으면 강과 함께 걷게 되고 강을 따라 걷다보면 또한 길과 함께 걷는다. 어느 곳을 걷든 우리 삶은 강에서 시작하여 강으로 끝난다. 모든 길은 강으로 뻗어있고 또 강은 모든 마을, 모든 역사로 이어져 있다.
비는 호남정맥인 무등산, 별산, 천운산, 두봉산, 남쪽으로 떨어지면 보성강 섬진강이 되고, 북쪽으로 떨어지면 지석강 영산강이 된다.
그 남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용암산과 예성산 사이에서 예성강이 된다. 베 짜던 여인이 자신을 탐한 왜장을 끌어안고 죽었다는 붉은 전설을 품고 있는 베틀 바위를 지나 최경회, 문홍헌, 조현 등 충절을 기린 삼충각 앞 충신강에서는 어느새 붉은 백일홍보다 더 시붉게 흐른다. 그리고 다시 능주에 이르러 영벽강이 되어 푸르게 푸르게 연주산을 휘돌아 나간다.
산이 뻣뻣한 남자라면 강은 사근사근한 여자고, 산이 단단한 뼈라면 강은 유연한 핏줄 같다. 이런 개성 있는 강처럼 그 강을 닮은 사람들 역시 각기 지역 색을 띠고 산다. 그러니 강마다 고유의 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강들도 영산강이 아닌 비로소 생명력 있는 고유의 강이 되고, 각기 존재의 강이 되고, 지역의 특성이 되지 않을까.
강둑을 걷는다. 건너편을 바라본다. 우리 인간도 찰나에 섬진강이 되기도 하고 영산강이 되기도 한 존재처럼 호남정맥 사이로 떨어지는 빗물 같은 운명을 사는 것 같다. 그래서 건너편은 항상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경의 장소였다. 제우스의 육신을 보고 싶어 한 세멜레와 하늘 마차를 몰고 싶어 한 파에톤처럼….
희망의 강이자 절망의 강은 신화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실제로 호기심과 두려움을 함께 자극하며 흐른다. 그래서 강을 걷는다는 것은 생사를 걷는 길이고, 삶을 읽는다는 의미가 된다.
아버지의 상여도 마을 앞, 강을 건넜다. 난 삼도천을 건너는 아버지의 꽃상여를 보면서 깃털도 가라앉는 카론의 강을 늘 떠올린다. 죽음보다 더 삶을 빛내고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강을 걸을 때마다 난 방전된 내 삶에 에너지를 빵빵하게 충전한다.
해질 무렵 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들처럼 힘차게 살고 싶다. 그러면서도 그 생명들의 모천, 위에서 언제나 아래로 흐르는 겸손, 막히면 슬기롭게 돌아갈 줄 아는 지혜, 작은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 어떤 형태도 고집하지 않고 담길 수 있는 융통성 있는 물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화순의 꽃길 강길, 꽃강을 걷는다. 꽃이 많아서 꽃강 길이 아닐 것이다. 아름다워서 꽃강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꽃강을 걷는다. 내 말을 들어주고 내게 말을 건네 오기도 하는 강, 때론 꽃잎을 싣고 흐르기도 하고 내 모습을 비춰주기도 하는 강. 화순의 다양한 빛깔의 강을 바라보면서 정녕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돌아본다. 저 강물처럼 흘러온 인생, 맑게 또는 붉게 흐르기도 했고 때론 혼탁하게 흐르기도 했을 것이다. 혹여 그도 저도 아니게 흘러왔다면 이제부터는 조용조용 낮게 흘렀으면 좋겠다. 남은 생은 화순하게 흐르고 싶다.
화순을 흐르는 화순 강에서 화순한 삶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