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만, 도’ - 오광록 서울취재본부 부장
2024년 07월 11일(목) 22:00
1989년 고입 선발 연합고사를 앞둔 광주지역 한 신생 중학교 3학년 교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체 시험을 봤다. 신생 학교가 단시간에 성적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잦은 시험과 과도한 ‘사랑의 매’였다. 교실마다 ‘타악~’하고, 마른 장작 부러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이들의 비명도 이어졌다. 문제를 틀린 수에 따라 매를 맞는 날이 늘 수록 모의고사 학교 평균은 치솟았고, 해당 교사는 교장 선생님의 월요일 애국조회 말씀의 주요 등장인물로 호명됐다. 덩달아 시험을 보는 과목도 늘었으며, 사춘기 아이들의 엉덩이는 교문 앞 능소화처럼 더욱 붉게 멍들었다.

아이들의 잔머리도 진화했다. 애매한 문장이 많아 자칫 알고도 틀리기 쉬운 일부 과목에 대한 분석이 이뤄졌고, 특정 단어나 조사가 등장하는 문항이 정답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아이들 사이에서는 ‘더, 만, 도’의 법칙이 아폴로눈병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상황과 조건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는 ‘더’가 나오는 문항, 정답이 아닌 것을 찾으라는 문제에 가끔 등장하는 제한하고 한정하는 ‘만’. 그리고 추가로 요구하거나 동등한 위치나 조건을 부여해주는 ‘도’가 등장하는 문항이 정답일 비율이 높다는 것. 효과는 있었다. 정답으로 이어지는 경험담이 늘 수록 아이들은 신념처럼 ‘더만도’를 외쳤고, 어차피 틀릴 문제 ‘더만도’ 문항에 정답을 표기하면 채점하는 순간까지 마음은 편했다.

여야가 전당대회를 앞두고 ‘말의 성찬’을 쏟아내고 있다. 국민의힘은 ‘김건희 여사 문자’를 두고 설전을 주고받고 있다. 한동훈 당 대표 후보가 사과 의사를 밝힌 김 여사의 문자를 무시했는지 여부를 두고, 후보들이 연일 맹공을 퍼붓고 있다. 더불어민주당도 김두관 전 의원이 당 대표 출사표를 던지면서 이재명 전 대표와 ‘말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기억도 가물거리는 시절, 사춘기 소년이 문제를 해결했던 최후의 수단 ‘더만도’가 정치판에서도 유효하다면, 아마도 “‘더’ 잘하겠다” “저‘만’ 할 수 있다” “그것‘도’ 해 주겠다”고 말하는 정치인의 말이 거짓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겠다.

/오광록 서울취재본부 부장 kro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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