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언(食言) - 김지을 정치부 부장
2024년 05월 21일(화) 00:00 가가
“내 말을 믿어줘, 증세는 없어”(Read my lips:no new taxes). 아버지 부시로 불리는 미국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이 1988년 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한 발언이다. 그는 임기 중 재정적자 타개를 위한 증세는 없다고 약속했고 유권자들이 믿지 않자 이같은 슬로건을 강조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선 2년 뒤, 경제 상황이 더 악화되자 결국 그는 공약을 깨면서 증세를 택했고 2년 후 재선에서 낙선했다.
‘식언’(食言). 한번 입 밖으로 냈던 말을 다시 입속에 넣는다는 의미로, 앞서 한 말을 번복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식언이비’(食言而肥)도 이같은 상황을 비유한 말이다.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술자리에서 자신의 뒷담화를 해온 맹무백 등 신하를 꼬집는 과정에서 나왔다. 맹무백이 몸집이 비대한 곽중에게 놀림 삼아 “어떻게 살이 쪘소”라고 묻는 것을 보고 애공이 도중에 끼어들어 “(당신들이 한) 거짓말을 먹으니 어떻게 쌀이 찌지 않겠냐” 고 답했다고 한다.
우리 정치사는 ‘식언’, ‘말바꾸기’의 역사다. 대통령도 빼놓을 수 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6·25전쟁 당시 ‘서울 사수’를 밝히고도 몇 시간 뒤 한강다리를 폭파시키고 후퇴했다. 쌀 개방(김영삼), 대선 불출마·정계은퇴(김대중) 등도 대표적 식언으로 평가받는다. “특검을 왜 거부합니까? 죄 졌으니까 거부하는 겁니다”(2021년 12월), “5·18정신이라는 것은…헌법 가치를 지킨 정신이므로 개헌 때 헌법 전문에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2021년 11월)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발언은 어떤가. 정치인의 말은 무게가 달라야 한다. 진정성과 신뢰가 담보돼야 한다. 그것을 통해 법이 만들어지고 정책이 수립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대통령의 말은 더하다.
윤 대통령은 최근 전남 민생토론회에서 국립 의대 신설과 관련 “어느 대학에 할 것인지 전남도가 정해서, 의견 수렴해서 알려주면 추진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30년 숙원 앞에서 또 말이 뒤집힐까 두려워해야 하는 건 주민들 몫인가.
/dok2000@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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