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의 의무를 가르치는 어느 아버지의 편지 -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4년 02월 05일(월) 00:00 가가
혼탁과 온갖 술수가 난장을 펼치던 시대에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간곡한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묶은 책은 이제 귀한 고전이 되었으니 세상의 아들들에 남긴 편지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로마의 유명한 인문학자, 정치가이자 위대한 사상가였던 마르쿠스 키케로(기원전 106~43년)이다. 당시 정치가로서의 키케로의 삶은 비방과 굴욕의 연속이었다. 그런 와중에 키케로는 정치가의 길을 가는 아들에게 권리에 따르는 ‘의무’의 중대함을 반복하며 강조한다. 의무를 행하는 것이 사람이 지켜야 할 최고의 선이며, 도리이자, 사회공동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 편지가 의무와 책임이 모든 권리의 토대와 전제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쓴 ‘의무론’이다.
키케로는 정치가와 철학자로서의 실천적 윤리를 빼곡하게 썼다. “네가 모든 점에서 나를 능가해주기를 바란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세상이 더 나아지는 일에 의무를 다하라는 마음일 것이다. 자신이 위태로운 상황에도 선한 삶의 가치에 대하여 이렇게 강조한다. “불의를 저지르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폭력과 기만이다. 기만은 여우의 교활함처럼 보이고, 폭력은 사자의 사나움처럼 보인다. 폭력과 기만은 인간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지만, 기만이 더 큰 혐오를 받아 마땅하다. 남을 가장 많이 기만하면서도 자신은 마치 선인이라도 되는 양 위장하는 자들의 불의가 가장 위험하다.” 누구나 마땅히 폭력성은 물론이고 특히 여우 같은 교활함을 더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의와 부정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우리는 용감하고 고매한 자, 선하고 정직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지 털끝만큼이라도 남을 기만하는 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어떤 형태의 불의든 거부하는 것이 선을 위한 의무라는 의미다.
선의 실행을 의무로 보는 키케로에 따르면 선은 네 가지의 기본 덕목인 지(知), 의(義), 용(勇), 인(忍)을 전제로 한다. 선함을 아는 힘이 지혜에서 온다고 보는 대목이 특별하다. 사실 의무와 책임을 가볍게 여기는 세상에서 교활과 꼼수와 불의가 얼마나 쉽게 활개를 치는가. 그래서 더욱 키케로의 ‘의무론’은 인문 정신의 표상이자 시대의 도덕 교과서 같은 것이었다. 의무론의 핵심은 어떤 것에 대해서 의무를 지킬 것인가에 대한 답에 있다. 그는 선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옳을 수 없고 유익한 것도 아니여서 지켜야 할 의무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선함은 옳음을 뜻하며, 이를 지키는 의무 이행 없는 권리는 허용될 수 없다. 설령 유익하게 보인다고 해도 선하지 않은 일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일이다. 키케로는 다시 근본적 물음을 한다. “선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명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어야 할 만큼 이롭고 추구할 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 있을까?”
우리는 지금, 폭력성과 교활함이 선한 의무와 책임을 대신하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각자의 욕망에 취해서 의무는커녕 권리의 과용과 기만의 술수만 넘치는 것을 보면서 할 수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키케로는 선을 의무로 행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선의 의무를 행하는 것은 개별적 욕망을 이성에 복종하도록’ 하며, 이러한 의무의 이행은 실천을 통해서 공동체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때 의무 이행의 선한 동기가 가장 중요한데, 동기가 선해야 전체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익하지는 않지만, 선할 수 있다’ 거나 ‘선하지 않아도 유익할 수 있다’라는 주장은 궤변이다. 선을 위한 의무의 이행은 개인의 위치와 역할에 상관없이 모두의 의무이자 윤리적 삶의 법칙이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가타부타할 것도, 이런저런 조건도 없이 그냥 따라야 하는 ‘정언명령’이다. 이 명령은 어떠한 조건이나 결과의 유불리에 상관없이 절대적 의무이다. 정언명령은 위치의 고하와 위치에 따른 권리를 넘어서,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보편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무를 권리로 해석하는 여우들의 교활함이 거셀수록, 선의 의무를 위한 지혜와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 곧 우리가 행할 정언명령의 의무이다.
우리는 지금, 폭력성과 교활함이 선한 의무와 책임을 대신하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각자의 욕망에 취해서 의무는커녕 권리의 과용과 기만의 술수만 넘치는 것을 보면서 할 수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키케로는 선을 의무로 행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선의 의무를 행하는 것은 개별적 욕망을 이성에 복종하도록’ 하며, 이러한 의무의 이행은 실천을 통해서 공동체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때 의무 이행의 선한 동기가 가장 중요한데, 동기가 선해야 전체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익하지는 않지만, 선할 수 있다’ 거나 ‘선하지 않아도 유익할 수 있다’라는 주장은 궤변이다. 선을 위한 의무의 이행은 개인의 위치와 역할에 상관없이 모두의 의무이자 윤리적 삶의 법칙이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가타부타할 것도, 이런저런 조건도 없이 그냥 따라야 하는 ‘정언명령’이다. 이 명령은 어떠한 조건이나 결과의 유불리에 상관없이 절대적 의무이다. 정언명령은 위치의 고하와 위치에 따른 권리를 넘어서,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보편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무를 권리로 해석하는 여우들의 교활함이 거셀수록, 선의 의무를 위한 지혜와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 곧 우리가 행할 정언명령의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