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것에 대하여- 이중섭 소설가
2023년 06월 27일(화) 22:00
우리 또래의 친구들은 다들 새로운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일을 하더라도 기존의 일을 계속하려 한다. 퇴직이 가까운 친구들은 당분간 쉬고 싶다는 말만 한다. 하지만 이번 중학 동창 모임에서 만난 친구 S는 우리와 달랐다. 그는 카톡이나 페이스북을 하지 않기에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당연히 참석하지 못할 줄 알았다. 모임 장소에 나타난 그는 웬걸 머리가 배코였다.

“왜? 어디 안 좋아?”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아냐. 얼마 전에 막내가 입대를 했어.” 그는 힘내라는 뜻으로 머리를 빡빡 깎았다고 했다. 아이들이 셋이던가? 막내가 늦둥인 모양이다.

“그런다고 머리를 깎아? 깜짝 놀랐잖아.” 어릴 때부터 녀석은 조금 달랐다. 또래들에 비해 슬거웠다.

“자네, 글 잘 보고 있어. 글을 읽을 때마다 뿌듯하네.”

SNS를 하지 않는 그가 어디에서 내 글을 읽었을까. 하긴 페이스북과 한 달에 한 번 쓰는 이 글 중의 하나일 터다.

“중학교 일 학년 때부터 난 자네를 진정한 글쟁이로 생각하고 있었네.”

그때가 첫 만남이었다. 글짓기 숙제가 있었는데 수업 중에 국어 선생이 내 글을 읽었던 일을 말한다. 그는 무알코올 음료만 마신다. 이미 소맥 서너 잔을 마신 나는 교수 친구의 칭찬에 어린아이처럼 떠들어댄다. 문득 동창 누군가에게 들은 궁금한 얘기가 떠오른다.

“근데 요즘 또 대학교에 다닌다고?” 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가르치면서 몇 년 전에는 법대를 마치더니 이제 국문과에 다닌다고 한다.

“왜, 그냥 편입을 하지, 그랬어?”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세상살이의 기준으로 그에게 말한다.

“아니, 처음부터 배우고 싶었어. 문학개론을 읽었던 젊었을 때의 나, 학문을 배울 때 맨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고 싶었거든.”

나와 다르게 절절함이 있다. 나도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던 대학 새내기의 마음이 그리울 때가 종종 있다. 글도 잘 쓰는 그가 늦은 나이에 국문학을, 아니 문학에 대해 뭔가 줄기를, 아니 문학이란 여신의 아리따운 치맛자락을 잡으려는 듯 부럽다.

얼마 전에 읽었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행동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친구들이 가끔 참석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러 주위로 모여든다. 그는 일상적인 말로 친구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힘이 난다, 항상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자만하지 않았고 잘 사는 사람들 편에 선 적이 없다고 얘기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공부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가 보고 싶은 과가 있는데.” 친구들이 다들 무슨 과냐고 묻는 듯 시선을 집중한다.

“간호학과를 한 번 갔으면 해.” 다들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쳐다본다. 부모님이 아플 때 주사 때문에 겪었던, 아무것도 아닌 일로 한밤중에 간호사를 부르던 일들을 얘기한다. 그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추상적인 학문보다 실용적인 학과가 살아가는 데 더 필요하긴 하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주사 때문에 겪었던 일들이 계속 마음에 남더라고.”

한껏 뇌 속에 채웠던 알코올 기운이 싹 달아났다. 머릿속이 쨍하고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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