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행복의 조건은 책과 의자와 햇빛”…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
2023년 06월 22일(목) 19:15
장석주 지음
“책들을 읽고 사유의 덩어리를 잘게 부수고 헤집으며 심연으로 침잠하는 시간은 행복했다. 그 몰입을 위해 저만치 밀쳐 두었던 현실은 사유의 시작이자 끝이다.”

작가 장석주는 날마다 읽고, 생각하고, 쓴다. 그런 속에서 세상에 선보인 100여권의 책들을 통해 시인과 에세이스트, 인문학자, 산책자로 다면적인 정체성을 형성한다. 신간 ‘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는 ‘책 읽는 인간’으로 일관되게 살아온 저자의 일상과 독서편력 속에서 문향(文香)을 발산한다. 몸과 음식, 사랑, 불행, 죽음, 노동, 불면, 고독, 여행, 망각, 팬데믹, 바둑 등을 사유의 원소로 삼아 ‘시인의 마음’과 ‘인문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를 오롯이 담았다. 작가는 크게 ‘경이로운 날들’과 ‘침잠하는 날들’, ‘기다리는 날들’ 등 6개의 주제로 나눠 98편의 인문에세이를 담았다.

표제작인 ‘에밀 시오랑을 읽은 오후’를 우선 펼쳐본다. 작가는 “인간이므로 우리는 나쁜 별 아래에서 태어났다”라는 루마니아 출신인 에밀 시오랑(1911~1995)의 비관주의에 마음을 빼앗겨 열광했다고 토로한다. 젊은 날의 의식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를 매개로 삼아 죽음과 불안, 자살, 웃음에 대한 생각을 풀어낸다.

“독서습관의 결과로 나는 읽고 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내 인생의 선택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은 책과 함께 한 삶이다. 내 행복의 조건은 책, 의자, 햇빛이다.”

“뼈가 약하고 살이 연할 때 나를 단련한 것은 책이고, 인생의 위기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도 책이다.”

여러 글들에서 드러나는 공통 분모는 ‘책 읽기’이다. 저자는 ‘책 읽기라는 모험이 사라진 시대’에서 “인류는 구술 문화시대에서 문자 문화시대를 거쳐 구텐베르크 이후 시대로 넘어오면서 학습과 훈련을 통해 ‘읽는 뇌’를 갖게 되었다”면서 “읽는 뇌의 시대가 끝나면 종이책도 사라질 것이다”고 강조한다.

또한 걷기와 산책, 달리기, 노래, 음악, 바둑 등에 대한 에세이도 흥미롭게 읽힌다. 저자는 인간의 걷기와 달리기에 대해 사유하며 “산책자의 출현은 걷기를 미학적인 것의 일부로 귀속시키는 일종의 문화혁명이었다”고 표현한다.

저자는 “디지털 기기를 다루는 새 인류는 종이책 읽기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고요한 눈과 마음을 더는 갖지 못한다”고 우려한다. ‘대추 한 알’을 붉고 둥글게 익게 만드는 힘에 대해 통찰하는 저자는 따뜻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며,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원숙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런 깊이있는 사색의 글들을 백색 소음 가득한 동네 카페에서 썼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외부의 시선으로 인간세계를 통찰하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제 마음의 순수와 태양에게 바치는 경의를 은유의 언어로 옮겨 적는 무욕한 자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지구에 머무는 동안 시와 음악의 아름다움을 인생의 기쁨과 보람으로 삼은 자와 벗으로 어울리고, 세상 끝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외계인으로 남으련다.” (‘내가 외계인이었을 때’중)

<현암사·2만4000원>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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