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일 선생의 전집을 읽으며 -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2023년 06월 19일(월) 00:00
“일본에 대해 과거사는 따지지 말고 미래로만 나가야 한다.” 요즘 정부가 하는 참으로 잘못된 대일 외교의 본보기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지금부터 430년 전에 일어난 임진왜란, 우리나라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고 백성들이 당한 죽음과 고통은 어느 정도였던가. 나주 출신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은 전라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전국을 돌면서 왜적을 물리쳤다. 마침내 경상도 진주성을 함락하고 전라도로 침략하려던 왜군을 진주성에서 막다가 끝내 성이 함락되자, 전라도 의병장들인 최경회·고종후·김천일 부자는 진주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고 말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국권이 일본에 침탈당하자 전라도에서 의병이 분기하여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고,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국가의 재산과 문화재들이 망가지고 말았던가. 1910년 끝내 나라가 망해 꼬박 35년 동안 우리 국민들과 나라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며 못 죽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했던가. 그런데도 일본의 죄악은 묻지 말고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잘못도 있으니 일본이 배상해야 할 대법원 판결의 배상금도 모두 포기하고 대신 우리나라에서 배상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니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려고 죽음을 불사한 충신 열사들을 우리는 어떻게 위로해야 하고 망국 이후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오래 전부터 임진왜란 의병장들에 대한 숭모의 정을 깊게 느꼈지만, 그중에서도 건재 김천일 장군의 인물과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함을 언제나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2017년 언양 김씨 대종회에서 간행한 ‘문열공 건재 김천일 선생 전집 Ⅰ·Ⅱ’ 라는 책을 읽으며, 선생의 인물·학문·의병 업적 등에 대한 전모를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흐뭇한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천일 장군은 나라에서 ‘창의사’(倡義使)라는 호칭을 내렸고 뛰어난 의병장으로 진주의 남강에서 아들과 함께 목숨을 버린 의인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선생이 여러 고을의 목민관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벼슬아치였고, 일재 이항(李恒) 선생의 도학 사상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학문이 깊고 높아 시호도 ‘충렬’(忠烈)에서 ‘문열’(文烈)로 승격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선생의 업적이 그런대로 드러나니 흡족한 마음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얼마나 많은 의병장이 나왔는가. 대부분의 의병장들의 시호는 충(忠)자 아니면 무(武)자를 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의병장 중에서도 경기도 출신 중봉 조헌 선생과 전라도 출신 건재 김천일 선생에게 ‘문열’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숙종실록’ 12권 숙종 7년 9월 25일의 기록을 보자. “영의정 김수항이 임금께 아뢰다. ‘창의사 김천일은 바로 선조 때 유일(遺逸)의 선비입니다. 그러나 학문이 매우 독실하여 당시 여러 현인들이 추앙하고 정중하게 여기는 바가 되었으며, 국난을 당해서는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공훈을 세운 것이 혁혁하니, 더욱 그의 수양한 바가 올바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시호를 ‘충렬’로 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아름다운 시호이기는 하지만, 김천일은 유자(儒者)로서 문(文)자 시호를 얻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결점인 듯합니다’라고 말하자 다시 ‘문’으로 시호를 의정(議定)하도록 명하였다.”

유자이자 학자로서의 건재 선생에 대한 평가가 그때 벌써 정확하게 세워졌음을 그런 데서 알게 해준다. 건재 선생은 두 아들을 두었으나 큰아들은 함께 순국하였고, 둘째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나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대부분 보존되지를 못했다. 일재 이항 선생의 수제자로 일재 선생의 행장(行狀)을 선생이 지었다는 기록만 있지 그런 글조차 전해지지를 않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애초에 전해지는 ‘건재집(健齋集)’에는 2편의 부(賦), 1편의 절구, 1편의 율시, 3편의 상소문, 13편의 편지, 1편의 명(銘), 3편의 제문, 1편의 격문, 기타 1편 등 도합 26편의 글이 왜소하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전집을 통해 실록 등 모든 자료에서 선생에 관한 기록을 모두 수집하여 전집으로 만들었으니, 선생의 사상과 철학이야 제대로 알 길이 없으나, 사람됨과 의병의 업적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친일 외교로 기울어 버린 오늘, 호남의 자랑이요 조선의 자랑인 학자 의병장 문열공을 제대로 아는 데 우리 모두 게으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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