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 국제 정원박람회’를 다녀와서- 이중섭 소설가
2023년 05월 02일(화) 00:00
이번 여행은 순천에 가 보는 것이 어떠냐고 아내가 물었을 때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고향을 오갈 때마다 ‘순천만습지’에 자주 들렀고 젊은 날에 한 삼 년 직장 생활을 했던 곳이기에 새로운 느낌이 나지 않았다. 아내 친구들과 부부 동반이라 딱히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에게 순천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 묘사된 한 장면으로 남아 있었다.

“읍의 포장된 광장도 거의 텅 비어 있었다. 햇볕만이 눈부시게 그 광장 위에서 끓고 있었고 그 눈부신 햇볕 속에서, 정적 속에서 개 두 마리가 혀를 빼물고 교미를 하고 있었다.”

무료함. 왠지 순천은 내 마음속에 지루함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봄날의 ‘순천만 국가정원’이 그토록 화사하고 청량할지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문을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호수에 떠 있는 언덕 섬이었다. 보자마자 와, 하고 탄성이 튀어나왔다. 거대하게 솟은 것이 제주 오름이나 고대의 고분처럼 보였다. 세 군데의 언덕마다 빙 둘러 길이 나 있었고 정상에는 순천만 쪽에서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겨울에 방패연이나 가오리연을 날리면 아주 제격일 것 같았다. 아직은 겨울 풀빛이 스산한 언덕 아래로 호수처럼 물이 차 있었다.

정문 왼편으로 각양각색의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꽃이 만발한 거대한 벌판이었다. 무스카리, 튤립, 에리시멈, 버베나 등 처음 보는 꽃들이 총총히 심겨 있었다. 꽃밭 가에 부스를 설치해 오밀조밀한 실내 정원을 꾸며 놓았다. 화분과 탁자, 작은 나무와 책장의 조화가 다양하고 다채로웠다. 언뜻 책장 안에 책 대신 포도주를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발걸음은 세계 정원의 축소판이 조성된 곳으로 향했다. 아기자기한 일본 정원, 고풍스러운 한국 정원, 멕시코 정원을 지나 네덜란드 정원이 있는 곳에는 커다란 풍차 모형이 이국적인 풍경으로 서 있었다. 가는 도중에 메타세쿼이아가 죽 뻗어 있는 길을 만났다. 나무도 엄청나게 컸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을 옮겨 놓았나 싶었다.

“누구에게 자랑해도 좋을 환상적인 곳이야!”

아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생긴 지 10년이 되었다. 꽃과 식물 그리고 나무들이 십 년 사이에 오래된 토박이처럼 터를 잡았다. 정원 중간중간에 특색 있고 오래된 나무들과 꽃들이 어울려 정원을 고풍스럽게 만들었다. 느릅나뭇과의 푸조나무는 이름처럼 생소했고 오래된 모과나무의 굵은 몸통 줄기는 요정이 나타날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기이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서 있는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하얀 꽃잎을 흩날리는 돌배나무도 운치를 더했다. 봄의 향연이 펼쳐지는 정원에는 멀리 순천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살랑거렸다. 꽃이 진 목련 나뭇가지에 멧비둘기 한 마리가 햇살을 즐기며 졸고 있었다.

정원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동천 둑길을 걸었다. 죽 늘어선 벚나무에서 벚꽃이 눈처럼 날렸다. 꽃비를 따라 둑길을 죽 걸어가면 포구가 나오고 거기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주인공과 여자 음악선생이 하룻밤 머물렀던 바닷가 옛집에 닿을 것 같았다. 안개가 무성했던 순천을 배경으로 우리 문학사에 지워지지 않을 ‘무진기행’ 현장이 벚꽃이 휘날리는 둑길을 따라 가면 환상처럼 펼쳐질 것이다. 그 사이에도 벚꽃은 난분분히 날리고 있었다.

일행 중 이 지역을 잘 아는 부부의 권유로 점심을 먹으려 구례로 차를 몰았다. 남녘은 언덕과 밭 그리고 산마다 온통 꽃 천지다. 꽃길을 따라 강이 차와 함께 달려왔다. 사월의 섬진강을 듬뿍 담은 쏘가리탕은 모두의 입맛에 딱 들어맞았다. 음식의 향기가 입안에서 계속해서 터지는 듯했다. 다들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도 계속 점심 얘기를 했다. 흥취에 겨워 아내의 친구가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가을이면 … 은행잎이 … 물드는 집 … 봄이면 살구꽃이 … 날리는 집” 띄엄띄엄 시구가 귓가에 자장자장 흔들린다. 차창 밖에는 사월의 섬진강이 댓잎처럼 푸르다. 하늘은 강 빛을 담은 채 길게 펼쳐져 있다. 이제 주룩주룩 매우(梅雨)가 내리면 매실에 오동통하니 살이 오르고, 바다에서 부화한 참게가 물길을 따라 엉금엉금 기어오르는 풍요의 계절이 찾아오리라.

이번 여행은 인생의 신이 우리에게 내려준 축복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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